열 세살, 안양 범계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나는 정말 과하게 활발한 아이었다. 말이 많고 촐싹대서 활발하다기 보다는 여기저기 안 끼는 곳이 없이 왕성한 활동을 했었다. 그러나 그 왕성한 활동에는 단한가지, '걸 스카우트'는 빠졌었다. 이유인 즉슨 엄마가 보이스카웃에 들었다가 장비만 잔뜩 사고 열심히 하지 않았던 오빠를 핑계로 나도 못 들어가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이건 우리 엄마의 큰 실수였다. 내 눈에 우리 오빠는 모험적이고 극한적인 것을 싫어하는 천상 남자이자 고지식한 모범생이었기 때문에 보이스카우트 체질이 아니었지만, 나는 무엇이든 호기심 많고 적극적으로 나섰기 때문에 누가 봐도 걸스카우트에 아주 적합한 아이였다. 어쨌든 우리 엄마는 나란 아이가 걸스카웃까지도 필요 없을 정도로 충분히 모험적인 아이라는 것을 아셨고, 결국 나는 9명의 함께 노는 친구들 중에 유일하게 걸스카웃 활동을 하지 않는 아이가 되었다. 가끔 점심시간에 방송으로 걸스카웃 모임을 알리면 모든 친구들이 쏴아악 썰물처럼 내 눈 앞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나는 개연치 않았다. 다른 친구들과 놀면 되니까. 덕분인지 몰라도 나는 친구가 더욱 많아졌다. 걸스카웃 친구와 걸스카웃이 아닌 친구들까지.
나는 선생님 복이 정말 많은 아이였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수많은 나의 선생님들이 인생에 알게모르게 큰 영향을 주셨고, 나의 사상과 인생관과 살고 있는 방식까지 많은 부분의 방향을 제시해 주셨다. 그 중에는 지금까지 정신적 멘토가 되어주시는 공분근 선생님도 있지만, '자립'과 '자율'이라는 것을 가장 먼저 가르쳐 주신 건 초등학교 6학년 담임이셨던 눈퉹이, 진영수 선생님이 아닐까 한다. 선생님은 참 건강한 분이셨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고 한달 뒤에 서울로 전학을 간 뒤에, 폐암에 걸려서 돌아가셨지만 내가 기억하는 선생님은 몸과 마음이 너무도 건강한 분이셨다. 선생님이 '눈퉹이'라고 불리는 것은 학교 과학시간에 나온 '눈퉹이'라는 물고기의 사진이 눈이 유독 튀어나오셨던 선생님과 너무도 닮아서였다. 선생님은 등산을 너무 조아하신 나머지 한달에 한 번 있는 '책가방 없는 날'의 모든 일정을 어느 순간 단체 등산으로 바꾸어 버리셨다. 다른 반이 영화를 보러 갈때 우리반은 관악산으로 등산을 갔고, 선생님의 제안으로 6학년 모든 반이 다 함께 등산을 갈 때도, 평지길로 가는 다른반 친구들과는 달리 우리반은 암벽을 오르내리게 시키셨다. 당시 선생님은 '여자 회장'이라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항상 나를 암벽타기에 앞장 세우셨다.
선생님은 어울리지 않게 '빨간티코'를 타고 다니셨는데, 하루는 풍물반인 나와 친구들 5명을 모두 데리고 한 체육대회에 가서 공연을 시키셨다. 근데 티코는 북을 치는 170cm의 초등학교에서 제일 건장한 남자애들이 타기에는 너무 비좁았고, 심지어 내 장구와 북 등 악기까지 실어야 했기에 빨간티코는 말그대로 포화상태였다. 우리는 기네스 북에라도 오를 듯 소리를 질러가며 티코에 몸을 간신히 실었고 선생님과 함께 간 어느 운동장에서 한바탕 신나게 공연을 했다. 왠일인지 그때 그 좁아터진 빨간 티코안에서 소리지르며 웃었던 그 느낌과 선생님이 사주셨던 짜장면 한그릇의 맛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6학년 여름 방학 때에는 경기도 일대의 산을 타는 '향토순례자'라는 이름의 도보행진을 했었다. 눈퉹이 선생님은 우리반을 중심으로 한 16명 정도의 아이들을 데리고 여기저기 행군을 하셨다. 밥도 함께 해 먹고, 잠은 근처의 학교에서 잤다. 걸스카웃이 너무 부러웠던 나는 모든게 너무 신났다. 방학이 끝나고 우리 행군에 끝까지 참여했던 친구들은 구령대에 올라가 모두 상장을 받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다 선생님이 생각하신 것이었지만, 당시에 우리는 친히 교장선생님이 직접 건네 주시는 상장을 통해 뭔가의 행군을 끝마친 것에 대한 보람과 자신감을 더욱 가득 가질 수 있었다.
산을 탈때, 선생님은 항상 아이들을 앞장 세우셨다. 나도 여러번 선두에 서서 일행을 인솔한 적이 있는데, 처음 오르는 산에 두 갈래 길이라도 나오면 항상 뒤를 돌아 선생님에게 도움을 청했다.
"선생님, 길이 두갠데요?"
"응, 두개네. 그래서??"
"어디로 가야되요?"
"어디로 가야할까?"
"음.... 여기요?"
"그래, 알면서 왜 물어봐?"
늘 이런 식이었다. 길을 몰랐던 모든 친구들은 오히려 선생님의 되물음에 길을 찾았다. 사실 대충보면 오르던 길이면 오르막길로 가면 되고, 내려오던 길이면 내리막길을 선택하면 되었던 것이다. 나중에 연말 학급 문집에 선생님이 써 주신 글에는 '대게 우리 아이들이 모두 답을 알고 있다. 그걸 직접 스스로 찾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한 교육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산을 엄청 오르던 어느날 부턴가 나와 친구들은 선두에 서서 선생님께 묻지도 않고 길을 찾아갈 수 있게 되었다. 자립과 자율은 선생님과의 등산과 도보여행에서 배운 가장 큰 가르침이었다.
그리고 그때 그 나이의 두배가 된 지금도 나는 여행을 할때, 혹은 인생을 살아가다 가끔 어느길로 가야할지 의문이 들 때 눈퉹이 선생님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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