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2012' 歸路_1 : Vietnam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2012' 歸路_1 : Vietnam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2년 3월 12일 월요일

[Ha Noi] 잠시, 멈추어서

#1.
아주 잘 여행해야만 한다는 부담, 2년간의 생활을 잘 정리해야만 한다는 부담, 내가 왜 베트남을 사랑해야만 했는지 그 확실한 이유를 찾아야만 한다는 부담,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이곳을 하나라도 더 담아가야 한다는 부담... 여행을 하던 중 언제부터인가 이런 것들이 부담이 되기 시작했다. 덕분에 몸과 마음은 점점 쉽게 피로해졌다.

내가 편해야 한다. 더 놓아야 한다. 잠시 쉬어가자.




#2.
여행 안에서 그 여행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은 여행자 스스로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여행을 하는 동안 그 모든 순간들에 너무 충실하려고 나머지 그것을 내 것으로 흡수하기 도 전 다른 것을 찾게 된다.

나의 여행의 속도는 너무 빠르다. 찍고 찍고 움직이는 일부 한국 여행자들처럼 이동이 빠르다는 의미는 아니다. 매일의, 매 순간의 에피소드를 통해 내 교훈을 가슴에 받아들이고 정리하기도 전에 또 많은 것들을 시청각 기관에 담아 버리려고 한다. 넘치고 넘쳐 하나도 제대로 담지 못하게 된다. 하나도 놓치지 않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라도 제대로 담아가는 것 아닐까. 더 천천히.




#3.
며칠을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하노이에서 편하게 쉬고 있다. 베트남에서 이렇게 저렇게 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옆에서 보면서, 내가 과연 한국에 가서도 '지금처럼 내 고집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키고자 하는 가치관들, 내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들.. 그런 이상들이 어쩌면 한국에서 동떨어져 살아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들이 아닐까 하는 겁이 났다. 나도 돌아가면 똑같은 삶을 살 수 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 나 역시 아직 성숙치 못한 인간일 뿐이니까.




#4.
내가 생각하는 '국제개발', 혹은 '지역개발'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는 '지속持續'이다. 그런데 그 거창한 '국제개발, '지역개발'이라는 말이 결국은 사람이 어울려 잘 살아가는 것에 대한 모든 활동이기 때문에 개개인의 삶, 그리고 공동체의 삶을 빼놓고는 사실 아무것도 논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현장에서 계속 살아가는 주민들뿐 아니라, 잠시나마 일개 활동가의 역할로 살아왔던 내 자신의 삶에서도 '지속'이라는 것은 아주 중요한 키워드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사랑', '가족', '건강', '일'…. 등 각자의 '삶'을 구성하는 이 모든 요소들이 '지속持續'없이 유한有限하기만 하다면 그게 얼마만큼의 가치를 가질 수 있을까. 모든 것은 변한다. 하지만 그 변화 속에서도 나름의 유연한 '지속持續'은 필수요소다.


2012년 3월 9일 금요일

[Ha Noi] 웰컴백 투 하노이

#1.
찌뿌드드함에 눈을 뜨자 창 밖으로 익숙한 풍경들이 나타났다. 물에 잠긴 진초록의 논, 그 중간중간에 방향없이 얹어진 묘들, 그리고 안개 낀 서늘한 아침에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하노이였다.

'다낭'발 '하노이'행 야간 침대버스의 도착 예정시간은 6시였지만, 역시나 터미널은 커녕 이제 막 하노이 외곽에 접어든 시간은 아침 8시가 되어 있었다. 차창 밖 간판에 문득 익숙한 주소가 보였다. 우리 센터 여직원 Tham의 마을이었다. 제 작년 Tham의 결혼식에 초대받아 직원들과 찾아갔던 기억이 있는데, 그때 지나쳤던 기찻길도 보였다. 엊그제 같던 생생한 기억인데 Tham은 이미 아이를 출산하러 휴직을 한 상태다.

저 길로 계속 가면 내가 2년을 보냈던, 가족같았던 우리 직원들이 있던, 그리운 소똥냄새 가득한 우리 센터 마을이 나오는데.... 향수를 느끼기도 잠시, 버스는 바로 머리를 꺽어 다른 방향을 향한다. 우리 동네가 다시 멀어진다.

어쨌든 하노이에 돌아왔구나. 오래 살던 곳으로 돌아온다는 건 이런 기분이구나.




#2.
"요즘 하노이 날씨 완전 따듯해. 날씨 다 풀렸어."

전화 넘어로 들려온 이 한마디만 철썩같이 믿고, 반팔 하나에, 발목을 내보인 짧은 바지에, 2주만에 이미 헤질데로 다 헤진 쪼리를 신고 하노이 남부의 지압밧 터미널(BX. GIÁP BÁT)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추위에 놀란 나머지, 나는 떼로 몰려드는 삐끼 아저씨들을 가로질러 화장실로 뛰어갔다. 체온의 변화에 몸이 놀랬나 보다. 하노이 예보를 믿었던 내가 잘못이지..;;

화장실 관리인 아주머니에게 이용료 2000vnd을 내고는 미딩으로 가는 버스를 물어봤다. 그러자 아줌마는 웃으며 내 뒤를 가리키신다.

"그냥 저 아저씨 쎄옴타고 가"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내가 버스에서 비몽사몽 내릴때부터 나에게 말을 걸었던 아저씨가 서 있다. 내 화장실까지 쫒아오신게다. 귀에 쏙쏙 들어오는, 반가운 하노이 발음으로 베트공 모자를 쓴 아저씨가 가격을 제시한다.

"7만동에 태워줄께."
"아저씨, 쎄옴 타다가는 추워서 죽겠어요."
"알았어. 6만동."

나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얼른 배낭에서 바람막이를 꺼내 입었다. 그래도 발이 시려운건 어찌할 방법이 없다. 간밤에 비가 왔는지, 진흙탕이 된 터미널 바닥 위를 조금 걸었다고 내 맨발엔 이미 여기저기 구정물이 튀어 있다. 신발은 내 배낭 제일 밑에나 들어있다. 귀찮다.

"아, 추워요. 5만동!!"
"하하하. 알았어. 5만동"

아직은 한참 한겨울 복장을 한 하노이안들이 잔뜩 움추린채, 내 쪼리와 옷차림새를 향해 이상한 눈초리를 보내왔다. 나는 애써 그 눈길들을 외면하며 내 앞에서 운전하고 있는 쎄옴 아저씨 등이 조금만 넓었으면 좋았겠다는 원망만 15분째,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회사에 있는 친구네 집 열쇠를 받아다가 주인 없는 빈 집에 뛰어 들어가 뜨거운 물로 몸을 한참 녹였다. 추위와 피로가 슬슬 풀렸다.

고작 '영상 10도'에 하노이에서 부모의 오토바이를 타던 아기가 추워서 죽었다는 뉴스를 들었을때는 정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었는데, 오늘 정말이지 진심으로 공감되기 시작했다. 얼어죽을 뻔했다.

2012년 3월 8일 목요일

[Quang Nam] 꼰뚬에서 다낭 가는 길

#1.
꼰뚬에서 다낭으로 가는 이 길, 14번 국도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어 정말 이쁘다. 10~20m 마다 좌우로 계속 꺽어대는 꼬부랑 길이 너무 격해 잠을 자기 힘든 이유도 있지만, 길이 너무 아름다워 자는게 아깝기도 하다. 이미 내 옆의 25살, 꼰뚬사는 하(Ha)는 꿈나라로 간지 오래고, 12인승 미니버스안 10명의 다른 승객들 역시 베트남 사람 치고는 너무도 조용하다. 다들 이 길로 다낭을 한두번 다녀본 것이 아니기에 별 감흥이 없었겠지만 난 연신 앞 유리쪽으로 몸을 수그리고 창 밖을 감상하기에 바빴다. 열심히 카메라에 담아 보지만, 역시나 아무리 좋은 랜즈도 사람 눈에 비할바 못된다.

꼰뚬-다낭 구간의 아름다운 도로  @Choi Yuri




#2.
나를 보는 순간부터 시종일관 짓궂게 장난을 치는 우리 미니버스의 기사 아저씨는 37살로 건장한 체구를 가졌다. 아저씨가 나에게 계속 말장난을 치고 내가 또 거기에 굴하지 않고 꼬박꼬박 말 대답을 하는 덕에, 버스안 분위기는 제법 화기애애해졌다. 가끔 뒤에 앉은 아줌마들이 내 편을 들어주면서 나는 더욱 기세등등한 채 아저씨의 말에 지지 않을 수 있었다.

우리 기사 아저씨의 운전 테크닉은 가히 굉장했다. 아저씨 뒷자리 가운데 앉아 잠시 졸다가 덜컹하는 차의 반동에 잠기 깨었는데, 내 두눈에 기사 아저씨의 두 팔이 쭉 뻗어 있는 게 보이는 게 아닌가. 어랏? 분명 차는 낭떠러지 옆 꼬불길을 쌩쌩 달리고 있는데 기사 아저씨의 손은 허공에 떠 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장시간 운전대를 잡고 있는게 뻐근하셨는지 두 팔을 앞으로 쭉 뻗고 양 팔꿈치로 한참을 운전하고 있던 것이다. 무려 계속 핸들을 좌우로 돌려야하는 아슬아슬 산길에서 말이다. 아저씨의 팔꿈치 감각을 믿을 수 밖에 없었다.

한번은 한참 시골길을 달리다가 마침 옆에 지나가는 소를 보고는 버스 안의 누군가 소의 종자에 대해 얘기를 던졌는데, 소에대한 의견이 분분해지자 기사 아저씨는 차를 잠시 세우고 말을 꺼낸 승객과 함께 종자를 확인하고 다시 출발을 했다.

또 베트남에서 보기 드물게 깔끔한 우리 기사 아저씨는 휴게소에서 받은 '세장의 물수건'으로 운전하는 내내 연신 차안의 구석구석을 닦았다. 그런데 그게 조금 과하게도 한손으로 핸들을 잡은채, 시선은 청소하는 곳을 보면서 다른 한 손으로 옆에 있느 손잡이니, 운전대 아래니, 차 천장이니를 구석구석 닦는다. 가끔은 핸들 밑으로 살짝 고개를 숙이기도 한다. 덕분에 차는 좌측의 중앙선을 넘나들기를 여러 번. 그마나 시속 5km로 달리고 있으니 다행이다.

우리 아저씨의 스킬은 운전을 하면서 두 손으로 담뱃불 붙이는 것은 아주 기본이고, 비닐커버에서 음악 씨디를 넣고 빼고 정리하는 것도 기본, 그러다 상체를 숙여 발밑으로 떨어진 비닐커버를 태연히 줍는 것도 기본이다. 이럴땐 잠시 눈을 감고, 이 상황을 안보는 게 상책.




#3.
그래도 우리 기사 아저씨는 나에게 참 친절했다. 사이드 브레이크 위에 쿠션을 하나 올려 놓더니 바로 뒤에 앉은 나에게 특별히 의자 사이로 다리를 펴서 쿠션 위에 편히 올려놓으라고 한다. 내 길이가 그렇게 길지는 않기 때문에, 그래도 나름 정말 편하게 버스를 탔다. 가끔은 정류장 없는 길거리에서 마냥 지나는 차를 기다리던 손님을 발견할 때, 내 발을 툭툭 치는 아저씨의 신호에 따라 나는 내 다리를 들어 쿠션을 뺐고, 그러면 아저씨는 사이드 브레이크를 잠그고 차에서 내려 손님과 흥정을 시작했다.

차가 다시 한참을 산길을 오르다가 승객들이 일제히 웅성대기 시작한다. 길 옆으로 아주 작은 폭포가 하나 보였다. 베트남 사람들은 이런 폭포를 참 좋아하고 이뻐라 한다. 역시나 기사 아저씨가 갑자기 차를 세우더니, 나에게 사진기를 꺼내서 찍으라고 권한다. 굽이 굽이 산길 중간에 차는 내 촬영을 위해 떡하니 서 버렸고, 나는 모두의 바램대로 카메라를 주섬주섬 꺼내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내가 사진을 찍자마자 차 안에 탄 열세명의 베트남 사람들이 동시에 나에게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저쪽에서 찍어야 더 이쁘다는 둥, 원래는 더 아름다운데 오늘은 물이 모양이 별로라는 둥, 저 뒤로 가면 더 큰 폭포가 있다는 둥.... 모든 사람들이 내 어깨를 툭툭치며 폭포에 대해 각자 열마디씩은 자랑하느라 나는 정신이 혼미하다. 나는 누구의 말에 대답을 해야하나 생각하다가 그냥 웃고 만다.

모두의 극찬을 받은 사진!!  @Choi Yuri

2012년 3월 6일 화요일

[Kon Tum] 어느나라 사람이에요?

에피소드 1)

꼰뚬의 빙선(Vinh Son) 고아원 아이들은 90% 이상이 소수민족이다. 아이들 중 제일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소수민족은 '바나(BaNa)족'이며, 때문에 아이들끼리는 주로 '바나어'로 말을 한다. 그리고는 나와는 다시 또 베트남어로 대화한다. 대부분의 아이들에게 '너는 어느나라 사람이니?' 라고 물으면 '베트남 사람이에요'가 아니라 '바나 사람이에요' 혹은 '00 사람이에요'라고 자기 민족을 자랑스럽게 이야기 한다. 오후 내내 나랑 한참을 놀던 아이들 무리 중 한 아이가 가우뚱하며 갑자기 나에게 물었다.

"쌤, 근데 쌤은 베트남 사람 맞죠?"

갑자기 이 왠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나는 다시 되물었다.

"하하하. 내가 너한테 지금 계속 한국어를 가르쳐 주고 있는데, 왜 베트남 사람이라는 거야?"

"아, 그렇죠? 근데 베트남 사람이라 한국 사람은 되게 닮았어요. 맞죠?"

"응 맞아. 많이 닮았어."

"근데 한국 사람이 더 예쁘고 잘생겼어요."

"아니야, 베트남 사람들이 더 예뻐.

"아니에요. 한국 사람들은 하얗고..."

"또안아, 쌤도 한국사람이야.....;;"

"어......쌤은.....................;;;"

아이는 끝내 말을 못있는다.

"하하하하. 베트남 사람은 날씬하고, 얼굴도 작고, 눈도 크고 작잖아"

나의 말에 다시 번뜩인 아이는 손으로 두 눈을 옆으로 찢으며 이렇게 동조했다.

"맞아요. 한국사람들은 눈이 이렇게 작아요."

"하하하하........;;;; 맞아 맞아."




그런데 한참 후, 옆에 앉아있던 다른 한 아이가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진지하게 다시 물었다.

"그런데..... 그렇게 눈이 작으면 몇 퍼센트나 보여요?"

"…………………….;;;"

이녀석ㅠㅠ 눈이 이렇게 작아도 세상은 100% 다 보인단다. 안타깝게도 나 역시 볼 것 못 볼 것 다 보며 살고 있단다.

vinh son의 개구쟁이들과 함께  @Choi Yuri









에피소드 2)

꼰뚬을 떠나기 위해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섰다. 매일 녹초가 되어 숙소 침대에 뻗어있던 이 시간의 아침 시장은 아침 저녁으로 시원한 공기때문인지 훨씬 더 활기찼고, 한켠에선 소수민족 의상을 입은 여인 둘이 산에서 캐온 야채를 가득 담은 바구니를 등짐 지고서 시장으로 종종 걸음을 옮기고 있다. 시장에는 시끌시끌 다시 또 여러개의 언어가 섞인다. 

다낭행 버스를 타기 위해 무작정 꼰뚬 버스 터미널에 왔다. 숙소에서 여기까지 꽤 달려왔는데, 다행히 쎄옴(오토바이 택시) 아저씨는 첫판에 적정가격을 부르셨다. 잘 왔다.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이른 아침 꼰뚬의 공기가 정말이지 상쾌하기만 하다. 

터미널에 도착하자 내 큰 배낭을 본 아저씨가 내가 외국 여행자임을 감지하고는 성급히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이렇게 물었다.

"타일랜드? 인도?"
"...........................;;;"

나는 아저씨에게 큰 소리로 '한꾸억(한국)!!!!' 이라고 대답하며 스스로를 달랬다. 아니, 그냥 아저씨가 오랜만에 동양 여자애를 봐서 갑자기 생각나는 나라를 말한걸꺼야. 그래, 그냥 아는 나라 몇개를 입밖으로 내 뱉은 것 뿐이야...... 라고 마음속으로 위안을 하지만 아무리봐도 '인도는 너무한거 아닌가?'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거울을 보니, 살이 빠지고 다시 흑인이 되어간다. 계속 이대로라면 더 많은 사람들이 나의 국적을 오해할 수도 있겠다 싶다.


*꼰뚬(Kon Tum) -> 다낭(Da Nang)가는 방법
꼰뚬시장에서 약 4km 떨어진 버스 터미널(BX. Kon Tum)에서 16인승 미니버스

탑승 금액 : 160,000~ 190,000vnd (회사별로 가격 차이가 조금 있음)소요 시간 : 6시간 (모든 사람의 예상시간은 6시간 이었으나, 늘 그랬듯 8시간이 걸렸다)배차 시간 : 약 2시간 차이로 버스가 있음 (7:30, 9:30am .....)

2012년 3월 5일 월요일

[Kon Tum] "이 시간에는 걸어다니면 안돼"

#1.
여행 정보 센터를 다시 찾았다. 점심시간이 막 끝난 텅 빈 사무실에는 똥글똥글한 여직원이 한명이 앉아 있었다. 프엉(Phuong)이라고 하는 스물 다섯의 이 똥글똥글하고 귀여운 친구는 여기서 2년 동안 회계업무를 맡고 있는데, 영어를 잘 못하기 때문에 외국인이 내가 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흠찟하다가 나의 베트남어 인사를 듣고는 이내 그 특유의 밝은 얼굴로 돌아왔다.

꼰뚬 여행정보센터에서 일하는, 무지 유쾌한 친구 프엉Phuong  @Choi Yuri


프엉은 뜨거운 한 낮 오랜만에 사무실에 찾아온 누군가가 반가운지, 나를 쇼파에 앉히고는 시원한 물 한잔과 함께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벽에는 한 가득 꼰뚬에서 내가 가보고 싶은 여러 소수민족 마을의 원주민들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이건 누가 찍은 사진들이에요?"
"음... 아마 외국인 여행자가 찍은 것 같아요."

프엉은 하나하나 마을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최대한 나를 위해 특유의 중부 발음이 강한 단어들은 여러번이고 반복하면서 천천히 소개해 주었다. 소수민족 전통의 모습을 그대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 사이로 모닥불 앞에서 여행자들이 원주민들과 함께 어우러져 춤을 추고 있는 사진이 눈에 띄었다.

"여기는 어디죠?"
"여기는 바나마을이에요. 이것은 바나족축제고, 이것은 전통 가옥 '냐롱(Nha Rong)'이에요"
"와, 이런 축제는 자주 열리나요? 지금 가면 볼 수 있을까요?"
"자주 열리는 것은 아니고, 또 지금은 여행자도 별로 없어서 보기 힘들꺼에요."
"이 마을은 어떻게 갈 수 있어요? 여기서부터 마을까지 갈 수 있는 버스가 있나요?"
"여기는 교통수단이 없어서 개별적으로 여행하기 힘들어요. 쎄옴(오토바이 택시)을 타고 이동만 하거나 설명을 듣고 싶다면 영어나 프랑스어가 가능한 가이드와 함께 가는 방법이 있어요."
"하하. 전 프랑스어는 '봉쥬르~' 밖에 몰라요. 가이드와 함께 가면 얼마죠?"
"하하. 저도 프랑스어를 몰라요. 여기에 가려면 조금 비싸요. 내일 아침에 미국 여행자들이 올 지도 몰라요. 여러명이 가면 나누어 내면 돼요."
"와, 좋아요. 그 가격은 저 혼자로는 무리이니 내일 아침에 다른 여행자들과 합류하게 된다면 같이 가고, 안된다면 혼자 쎄옴을 타고 가보죠."
"아침에 혼자가게되면 쎄옴 타는 걸 도와줄께요."
"고마워요, 프엉. 내일 아침에 올께요."


꼰뚬 여행 정보 센터 벽에 걸린 소수민족 마을 사진들  @Choi Yuri

그렇게 물 몇 컵을 마시고는 한참 이런저런 수다를 떨다 자리를 뜨려는 나에게 프엉이 다급히 말했다.

"아, 이 시간에는 돌아다니지 마요. 너무 더우니까 아무도 돌아다니지 않아요. 4~5시쯤 선선해지면 나와요."
"하하, 전 괜찮아요. 걷는거 좋아해요."
"숙소가 어디에요?"

나는 명함의 주소를 프엉에게 보여줬다.

"우와, 이 더위에 여기서 걸어왔다는 말이에요? 너무 머니까 나가서 쎄옴타고 돌아가요."
"하하하하. 프엉, 여기서부터 고작 300m 정도의 거리에요."
"그러니까요. 너무 멀잖아요. 쎄옴타고 가요."
"하하하................;;;"

역시 '베트남 사람은 삼보(三步) 이상에 오토바이 탄다'는 말이 맞다. 하하.





#2.
밖을 나오니, 역시 숨쉬는 공기조차 뜨겁다. 프엉의 말대로 일단 돌아가서 조금 쉬었다가 선선해지면 나오려고 다시 숙소로 향했다. 300m 거리에 인적이라고는 가끔 지나가는 오토바이 뿐이다. 저녁에 시끌시끌했던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시계를 보니 낮잠시간이다. 모두들 어딘가의 그늘에서 잠을 자고 있는 모양이다.

숙소에 거의 다 도착했을 무렵, 어느 가게 앞 그늘에 할머니 한 분이 나를 보더니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하신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어, 더우니까 이리 와."
"하하하. 괜찮아요."
"여기서 얘기하다가 가."

나를 불러세운 뚱뚱 할머니 옆에는 복권가방을 매고 복권을 파는 아줌마, 그리고 계속 무엇인가를 열심히 읽고 계신 고운 독서讀書 할머니 한분이 함께 있었다.

"사진 찍어드릴까요?"
"어, 나 찍어줘."

찰칵, 찰칵. 귀여운 뚱뚱 할머니가 흡족할때까지 몇장의 사진을 찍고나자, 뚱뚱 할머니는 옆에 있는 독서 할머니를 또 찍으라고 부추긴다. 그 와중에도 독서 할머니는 못들은 척, 계속 무언가를 읽으신다. 뚱뚱 할머니와 복권 아줌마는 독서 할머니의 그 모습을 찍는 나를 보고 꺼이꺼이 웃느라 정신없다. 할머니들 정말 귀여우시다.

"저 갈께요. 할머니 또 뵈요."
"응, 잘가. 근데 이 시간에는 걸어다니는 거 아니야. 더워."
"하하하. 네."

이 더운 낮에 걸어다닌다고 혼내시던, 귀여운 아줌마+할머니들  @Choi Yuri

이 동네에는 무슨 법이라도 있는지, 동네사람들이 하나 같이 낮에 돌아다니는 나를 보고 큰일이라도 난 듯 호들갑들을 떠신다. 하긴, 어른들 말 들어서 나쁠 것 없지. 그럼 나도 숙소가서 한숨 자야겠다.


[Kon Tum] 뜨겁고 뜨거운

#1.
꼰뚬에서 유일한 지역 여행정보 센터에 지도나 하나 얻을까 하고 갔다가, 점심시간인지 휑하니 아무도 없어 퇴짜를 맞았다. 강가에 있는 노천 커피숍에 들어갔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생산율이 무려 세계 2위인 베트남의 커피는 이곳 중부지방의 특산이기도 한 만큼, 역시 커피를 한잔 시켰다. 이곳 중서부에서는 카페쓰어(연유를 듬뿍 넣은 찐한 커피)를 시켜도 에스프레소 잔만한 작은 잔에 북부보다 훨씬 더 진하게 커피를 준다. 한국에서는 커피를 일주일에 한잔이나 마실까 말까했던 인간이지만 지난 2년간 거의 매일 마셨던 G7(진한 베트남 인스턴트 커피)로 이제는 진한 베트남 커피가 익숙해 질만도 한데, 이건 정말 눈 딱 감고 '원샷'해야 할 기세다.

꼰뚬 카페 스타일 삼종 세트 : 구수한 냉차, 기다림이 필요한 까페쓰어, 물수건이 담긴 얼음 그릇  @Choi Yuri




#2.
정말 심신이 녹을 정도로 더운 이곳, 서늘한 밤공기와는 정말 대조적이게 뜨겁다. 노천 커피숍에 있는 편한 의자에 앉아 멍하니 부는 바람을 기다려보니 문득 '날씨과 경제발전은 분명 상관관계가 있을 것 같다'는 잡생각이 든다. 이런 날씨와 이런 늘어짐 속에서 노동력을 강구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지 않을까. 저 태양 볕 아래를 5분만 걸어도 금새 정수리가 뜨끈뜨끈 해지고, 그늘에 앉아 있어도 눈부신 햇볕 때문에 자꾸 미간이 찡그려진다. 손가락 까딱 않고 숨만 쉬어도 어느새 땀은 송글송글 맺혀오고, 방금 먹은 점심은 이미 뱃속에서 꺼져버렸다. 한국이 만약 이런 날씨라면 전 세계 노동자들이 다 아는 한국어인, '빨리 빨리'라는 노동언어는 생기지 않았을지도.

저기 뜨거운 볕 아래로 한 아저씨가 온갖 잡화를 주렁주렁 매달은 커다란 보드를 매고 어디론가 황급히 길을 건너간다. 이 외국인 없는 조그만 동네에서 저 싸구려 썬글라스를 하루에 몇 개나 팔 수 있을까. 아저씨의 빠른 걸음을 보니 내가 다 숨이 막힌다.




#3.
부온 마 투옷(Buon Ma Thuot)도 그렇고 이곳도 그렇고 중서부 지역에 오니 식당을 가든, 커피숍을 가든, 노천에서 간단한 요기를 하든 항상 물 대신에 요 고소한 차를 준다. 쓰디쓴, 하지만 첫 만남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꿀꺽 마셔버렸던 하노이의 진하게 우려낸 녹차와는 다르게, 보리차 마냥 구수하니 꿀떡꿀떡 목구멍을 잘도 넘어간다. 요거 맛나다. 시원한 차를 몇 컵째 마시고 나서 한국으로 엽서를 썼다. 손에 난 땀 때문에 엽서가 자꾸 손바닥에 붙는다.


[Kon Tum] 베트남 서민식당 껌빈잔(Com Binh Dan)에서

많이 걸으니 확실히 뱃살이 빠진다. 앉은뱅이 의자에서 굳어진 뱃살이 신기하게도 고 며칠 내로 쏙 들어갔다. 사실 또 여행에서 걷는 게 익숙해질 때면 다시 오를 살이지만.

지난 이틀간의 고된 일정으로 아침에 천근만근 몸을 가누지 못하다가 11시쯤이 되어서야, 허기짐에 숙소를 나왔다. 밤에 도착한 싸늘하고 어두침침했던 읍내의 모습과는 달리, 너무 환해 눈이 부실 지경이다. 어젯밤 내가 묵고 있는 여관(Nha nghi)이 갑자기 정전이 되어서 창문 하나 없는 어둠 속에 너무 오래 있었던 탓일까, 해발 500m 지대라는 설명이 머쓱하게 내리쬐는 태양은 너무 뜨겁고 후끈후끈한 공기 때문에 숨쉬기가 답답할 따름이다. 나는 재빨리 미간에 만들어진 인상을 풀어줄 '그늘'을 찾는다.

물어 물어 껌빈잔(Com Binh Dan / 베트남식 백반 식당) 가게 하나를 찾았다. 내가 좋아하는 반찬을 골라 밥과 함께 접시에 담아 허겁지겁 먹고 있으니, 점심시간이 된 사람들이 하나 둘씩 들어온다. 식당은 곧 꽉 찼고, 소담을 나누면서 각 테이블 별로 즐거운 점심시간을 갖는데, 어랏? 각 테이블 별로 다른 언어들이 들린다. 중부지방 사투리 가득한 베트남어 테이블부터, 이 지역에 가장 많은 소수민족인 바나족의 바나어로 짐작되는 언어들, 그리고 처음 보는 소수민족 의상을 반쯤만 입은 소수민족 사람들의 새로운 언어가 이 식당 안에 마구 뒤섞인다. 그리고 그 식당 한쪽에선 한국어 가이드북을 펼쳐 놓고 유일하게 하노이 표준어를 쓰고자 노력하는 까만 여자애 하나가 게걸스럽게 밥을 마시고 있다.

여러 소수민족 언어가 공존하는 베트남 서민 식당, 어디서 또 이런 경험을 해 볼까. 진귀하도다.

꼰뚬 읍내의 친절한 껌빈잔 식당에서 푸짐한 한접시 25,000vnd  @Choi Yuri



나는 베트남을 여행하면서 껌빈잔을 아주 애용하는데, 사실 혼자 다니다 보면 특별히 별로 먹고 싶은 것도 없고, 먹을 곳도 마땅치 않아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껌빈잔을 애용한다. 왠일인지 나는 그곳이 질리지도 않는다. 게다가 나는 맛을 잘 모르고, 간만 맞고 배만 부르다면 다 맛있다고 해버리는, 미식가들이 경멸할지도 모르는 류의 사람이기 때문에, 사실 메뉴가 간단하며, 찾기 쉽고, 실패할 확률이 적고, 가격이 싼데다, 양까지 많은 껌빈잔은 바로 나를 위한 서민 식당이 아닐까 라고 믿고 있다. 지역마다 가게마다 반찬은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바다나 강이 가까운 지역에서는 해물이 다양하게 나오고, 아닌 곳에서는 다양한 고기반찬 위주로 나온다. 하지만 모든 껌빈잔의 공통적인 맛은 모든 며느리들이 다 알고 있다는 베트남 맛의 비법, '미원'일게다.

베트남에서 경험한 내 최고의 껌빈잔 집은 중부 꽝아이성, 공단 근처의 노동자들이 이용하는 단돈 17,000동(900원) 짜리 껌빈잔이다. 출장차 찾은 꽝아이 공업단지 내에는 번듯한 식당을 찾는게 너무 어려워 매일을 호텔 식당에서 식사를 해결하다가, 며칠이 지나자 그조차도 너무 질리다는 아잉뚜의 요구로 어렵게 겨우 찾아낸 노동자들의 식당이었다. 양도 종류도 맛도 가격도 정말 최고였다. 역시 함바집이나 기사식당이 진리라는 건 어느 나라나 똑같나 보다.

2012년 3월 3일 토요일

[Cu Chi] 다시 돌아온 베트남에서 잡생각, 내가 장거리 이동을 잘 견뎌내는 이유

#1.
장거리 이동을 너무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니, 대부분은 반나절 이상이 걸리는 버스나 기차의 이동시간을 듣고는 지레 겁먹고 질색을 하는 경우가 더 많다. 하지만 나는 장거리 이동이 나쁘지만은 않다. 반도국이지만 육로로는 그 어느 다른 나라로의 여행을 갈 수 없는 대한민국에 태어난 나로써는 버스를 타고, 배를 타고, 기차를 타고, 때로는 직접 걸어서 다른 나라로 이동한다는 그 차제가 아직까지도 매번 신기하고 즐거운 경험이다. 물론 수고는 따른다. 대부분 국경이동을 위한 큰 관광버스나 미니밴이 있는 경우가 있지만, 혹시라도 로컬버스를 이용하게 되면 밀입국자나 짐짝 취급을 받는것을 감수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2.
많은 사람들이 장거리 이동을 꺼려하는 이유는 불편한 자리이다. 푹신한 의자, 혹은 침대버스나 침대칸 기차라 할지라도 오랜시간 한 자세로 있어야 하는 것은 고역이다. 하지만 나는 감사하게도 어떤 장소와 어떤 환경과 어떤 자세에서도 자는 순간만큼은 편안히 숙면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난지라 다른 사람들의 불편함에 비하면 핑계거리가 되지 못한다.

스물 두살, 내 첫 배낭 여행인 인도에서 나는 인도 북부 라다크 지역의 추위와 허기짐을 핑계로, '캘커타에 가면 맛있는 게 많이 있다'라는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잠무(Jam Mu)부터 캘커타(Kolkata)까지의 무모한 장거리 기차 여행을 선택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루트'의 개념도 엉망진창이었고, 그 당시에는 인도 사람들이 말해준 약 30여 시간의 이동시간을 체감 하지 못했기에 무작정 기차에 올랐었다.

내 인생 첫 장거리 기차 이동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약 30여 시간이 지나기 전까지는..;; 기차 안에서 오가는 사람들을 만나는 즐거움과 차장밖의 새로운 것들을 마주하는 데서 오는 설레임, 그리고 혼자만의 공상을 펼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주어짐에 나는 감사했다. 그러나 기차안에서 몇끼째 짜이와 사모사와 바나나로 연명하며, 먼지 가득한 침대칸에서 마주하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떠나버리고 도착 예정 시간인 30시간은 훌쩍 넘어 버렸다. 마침내 바라나시에서 모든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썰렁해진 기차에서는 시간이 더욱 느리게 가기 시작했다. 한참을 잤을까 깨어나서 시계를 보면 고작 5분이 지났다. 그러기를 수십번 반복하자, 기차는 결국 '49시간'이 걸려 캘커타에 도착했다. 정말 잊지못할 2박3일이었다. 내 인생 첫 장거리 여행이 49시간이었기 때문일까. 그 후로 나는 49시간 이하의 모든 장거리 이동은 잘 할 수 있는 자신이 생긴것 같다.




#3.
내가 장거리 이동을 좋아하는 이유중의 하나는 버스나 기차에서 볼 수 있는 차창 밖의 풍경이 오롯이 내것이 된다는 것이다. 나는 그저 앉아서, 혹은 누워서 가만히 창 밖을 바라보고 있으면 바퀴 달린 이 커다란 tv는 이 세상 하나뿐인 나만의 다큐멘터리를 틀어준다. 버스는 때로 시골길을 달리면서 내가 직접 찾아가기 힘든 구서구석 사람들의 생활을 보여주고, 때로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낭떠러지 꼬부랑 산길을 아무렇지도 않게 곡예하듯 달리며 숨겨진 절경들을 나에게 보여준다. 내가 다큐멘터리를 끔찍이도 좋아하는 것은 맞지만, 나만이 볼 수 있는 창 밖의 리얼 다큐는 정말 질리지 않는 최고의 채널임에 분명하다.

Buon Ma Thuot에서 계속 만나게 되었던 정체 모를, 행선지 모를 차
로컬인듯, 로컬아닌 광역같은 루트의 차  @Choi Yuri



내가 장거리 버스 이동을 좋아하는 또다른 이유는 가난한 배낭 여행자로서는 감히 엄두도 못낼 고급 이동수단의 최고급 좌석부터 짐이나 심지어는 가축과 함께 타야하는 경우까지의 저려한 좌석까지 다양한 수단을 이용하게 되면 정말 다양한 인간군상을 만날 수 있다. 직항 국영 항공의 비지니스석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들과 꾸역꾸역 십수시간을 통로에 찌르러져 가야하는 로컬버스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은 분명 다르지 않은가. 물론 아직 비즈니스석에서 누굴 만나볼 기회는 없었지만.;; 같은 버스를 함께 타고 가는 안에서 만난 사람들은 기사님의 기호에 맞춘 휴게소와 노천 화장실과 온갖 사건사고(차량 고장, 교통 사고, 도로 유실 등)을 함께 겪으면서 돈돈한 사이가 될 수 밖에 없다.

Buon Ma Thuot 에서 Kon Tum 가는 길. 
터미널에서 출발할 때부터 시동이 잘 걸리지 않아 승객들이 내려서 밀어야만 했던 봉고차는 두번이나 중간에 서 버렸고, 결국은 타이어가 펑크까지 나면서 퍼져버렸다. 차가 설때마다 사람들은 태연히 각자 편한 자리를 찾아 수다를 떨기 시작한다.

터미널에서 출발할 때부터 시동이 잘 걸리지 않아 승객들이 내려서 밀어야만 했던 봉고차는 중간에 두번이나 멈춰 버렸고, 결국에는 타이어까지 펑크가 났다. 차가 설때마다 사람들은 태연히 각자 편한 자리를 찾아 수다를 떤다. 어느 누구 초초해 하는 이 없이.  @Choi Yuri

[Moc Bai 국경] 사이을 가르는 선, 그리고 사이을 잇는 선 '국경'

캄보디아에서 베트남으로 향하는 버스 안, 버스가 강을 건너고 있다. 버스는 사람을 싣고, 배는 사람을 싣은 버스를 싣고 메콩강 줄기 일지도 모르는 작은 강을 건넌다. 오토바이는 돼지를 싣고, 트럭은 넘칠듯 작물을 싣고, TV는 한류를 싣고 양 국경을 오간다. 전쟁이라는 재앙을 가지고 국경을 넘어 인간들이 넘어왔고, 평화와 화해라는 명분으로 다시 국경 넘어에서 손을 내민다. '선은 사이를 가르고, 선은 사이를 다시 잇는다.'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접했던 킬링필드의 강렬한 인상이 아직도 서늘하게 남아있는 가운데, 카지노 가득한 국경을 넘어 버스는 어느새 베트남에 들어와 있다. 베트남전 당시 구찌 터널로 유명했던 구찌 지역을 지나간다. 베트남에 도착하자마자 버스에선 그간 간신히 참아 왔다는 듯이 바로 신나게 영화 한편을 틀어주는데, 그게 또 미얀마 정부군과 반군들의 잔인한 내전 장면이 가득한 '람보'다. 나이를 보여주듯 눈이 축 쳐진 '실베스타 스텔론'이 나와서 '그래도 나의 근육들은 아직 죽지 않았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뒷짐이나 질 수 있을까 궁금하게 만드는 과하게 굵은 팔뚝으로 무시무시한 것들을 마구 쏴 댄다. 그리고 그것들은 사람들을 종이장마냥 너무나도 쉽게 갈기갈기도 찢어 놓는다. 영화에서 사람들은 너무 태연하게도 동강이 나고, 구멍이 나고, 터지고, 찢기고, 심지어 갈린다. 영화는 내내 누가 더 강하고 잔인한가에 대한 람보와 상대군의 무지막지하고도 무모한 대결을 보여준다. 결국 늘 그렇듯이 주인공 람보가 살아남고, 영웅이 된 그는 멋있는 척하며 미얀마의 작은 시골마을을 유유히 떠난다. 지구상에 가장 잔인한 것은 바로 인간이다.


차창 밖, 베트남 국경 목바이(Moc Bai)를 지나자 연날리기 한마당이 펼쳐진다  @Choi yuri

영화가 끝나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구찌의 어느 공원에서 온갖 연들이 하늘에 가득하니, 평화로운 연날리기 한마당이 열린다. 연으로 가득한 푸른 하늘이 아름답다. '곧 해가 지겠구나'는 감상도 잠시 곧 미친듯한 오토바이 행렬이 이어진다. 아, 정말 베트남에 왔구나. 시끄럽고, 더럽고, 비싸고, 정신없는 베트남에 나는 다시 와버렸구나. 어느새 입가에 웃음이 절로 번졌다.


캄보디아 국경을 넘어 베트남에 다시 와버렸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번지는 이 풍경, 그리웠나보다.  @Choi Yuri



2012년 2월 28일 화요일

[HCMC] '쩌우독'으로 가는 '프엉짱 휴게소'에서

#1.
다음 목적지를 정했다. 어짜피 내 비자 만료일 3일 전에 캄보디아로 가서 비자 클리어를 하고 와야 했기 때문에 국경마을로 가야했다. 이미 가 봤던 빈롱이나 껀떠보다는 여행자들이 적은 조금 더 구석지고 조용한 마을로 가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리고 지도를 보다가 내 눈에 새로운 국경마을 이름이 하나 들어왔다. 이름하야 '쩌우독(Chau Doc)'.




#2.
버스터미널에서 쩌우독행 버스를 탔고, 외지는 외지인지라 다행히 바람대로 여행자득 북적북적한 오픈투어 버스와는 달랐다. 무더위 속에 하루 종일 싸돌아다닌 강행군 끝에 나는 버스를 타자마자 곯아 떨어졌다. 그렇게 몇시간인가 꿀잠을 잔 것도 잠시, 휴게소에 차가 정차했고 우루루 내리는 사람들을 따라 나도 얼떨결에 버스에서 내렸다. 잠이 깬 이상 기지개라도 피지 않으면 휴게소에 정차하는 시간 동안 버스 안에 갇혀 홀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베트남 버스는 휴게소에 정차할 때, 보안상의 이유로 시동을 끄고 문을 닫아버린다. 내릴려면 다른 승객들 내릴때 잽싸게 내리시길;;) 사람들을 따라 화장실 앞까지 갔다가 별 볼일이 없어 그냥 다시 돌아 나왔는데, 그 사이 내 목적지인 'Chau Doc' 이라고 써진 버스가 멀리 돌아서 다시 내 앞에 와 있는 게 아닌가. 긴가 민가하면서 차에 올랐는데, 내 자리로 가니 아니 왠걸 어색하다. 뭐지? 하고 멍하게 서 있으니, 차장 아저씨가 그 자리 맞다고 빨리 앉으란다.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맞다. 이건 분명 내 자리가 확실히 아니다..!!' 몇시간 전, 처음 버스에 올라 자리를 확인했을 때, 좌석이 뒤로 재껴지는 손잡이가 부러져서 의자 밑으로 손을 깊숙히 넣어 간신히 조금 젖힐 수 있었는데, 이 버스의 내 번호 자리엔 버젓히 손잡이가 달려있지 않은가. 그때 마침 창 밖으로 우리 차에 탔던 아저씨가 앉아서 담배를 피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막 떠나려는 차에서 얼른 뛰어내렸다.

그런데 막상 차를 보내고 나니, 차 한대 없는 텅 빈 주차장이 이상해 보였다. 설마.... 하고 생각을 하면서도 다시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순간 먼저 떠오른 생각 하나, 여기 휴게소에서 노숙을 해야 하는구나. 저 안에서 음식을 사 먹으면 되겠고, 잠은 저쪽 의자에서 자는 게 좋겠구나. 버스 에어컨이 추워서 잠바를 하나 꺼내 입고 있길 정말 잘했다. 그 다음 떠오른 생각 하나, 떠나버린 버스 트렁크에 내 큰 배낭이 담겨 있구나. 다행히 여권과, 돈과 컴퓨터와 카메라가 담긴 작은 가방을 가지고 있으니 앞으로의 여행은 문제 없구나. 사실 지금 가지고 있는 짐이면 여행이 충분할지도 모르겠구나. 노트북 충전기가 없는 것만 빼고, 당장 칫솔이 없는 것만 빼고는 별 문제는 없지 않을까?


찰나의 시간동안 걱정보다는 홀가분해짐에 자유로움을 느끼기도 잠시, 저 멀리 어둠속을 돌아 원래 내가 탔던 Chau Doc 행 버스가 나타났다. 다시 찾은 배낭이 반갑긴 하지만, 마냥 좋지만은 않고 조금은 부담스러운 이 기분은 뭐지? 나 변태인가…;;

반갑지만은 않았던 그 배낭녀석.. 미안




#3.
내가 굉장한 자존감을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자유롭고 싶고, 나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어하고, 나만의 공간 속에서 공상하기를 원하면서 방해 받고 싶지 않은 사실은 외톨이. 내가 가진 그런 자존감이 절대적으로만 좋은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 자존감이 강해지면 조금은 이기적인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방 때문에 잠이 확 깬 버스안에서 잡생각.

역시 외진 지역으로 가는 버스라 좌석이 꽉 차지 않았다. 두자리에 누워서 편히 가야겠다. 앗싸.


[HCMC] 호치민시의 차이나타운, 쩌런(Cho Lon) 스케치

전통과 융화의 여유로움, 호치민의 차이나타운 '쩌런'

추위에 덜덜 떨며 생활하던 하노이에서 남부의 무더위가 아직 익숙해지지 않았던 어느 날, 어서 빨리 도심을 벗어나고만 싶었지만 쩌우독 행 버스를 저녁까지 기다려야 했기에 버스를 타고 슬슬 돌아다녀 보기로 했다. 사실 호치민시에서 더 이상 가보고 싶은 곳이 딱히 떠오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난번 마지막 호치민 방문때 버스를 타고 종점인 쩌런시장에 내리자마자 갑자기 몰아치던 비바람 때문에 정류장에서 우비만 하나 사가지고 바로 다시 버스를 타고 돌아왔던 것이 '쩌런'에 대한 내 모든 기억이기에 다시 '쩌런'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베트남어로 'Cho(쩌)'는 (지금 성조가 안써져 영어로 쓰니 이해 바람) '시장', 'Lon(런)' 은 크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큰 시장이다. 호치민시의 5군에 위치하고, 중국계 화교들이 살아가는 '차이나 타운'답게, 쩌런에서는 보통의 베트남 사람(낑족)들과는 조금 다른 모습과 조금 다른 삶을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Photo by @yuri choi. All rights reserved.
_Lumix GF2 + 20mm f1.7


2012년 2월 27일 월요일

[HCMC] 하노이 촌사람, 호치민의 신新여성에 놀라다

#1.
2년전, 이 하노이 시골 촌뜨기가 처음 호치민시티에 내려 왔을때는 정말 충격 그 자체였다. 하노이와 북부지역에서 봐 왔던 것을 베트남의 전부라 생각하며 반년을 살아왔었는데, 호치민 공항에 도착해 시내로 나오면서 나는 창문에 코를 박은 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노이와는 너무도 달랐던 것이다. 일단 북부지방 사람들보다 사람들의 체구가 훨씬 건장했다. 하노이 외곽 우리 시골마을에서는 그래도 제일 키크고, 제일 뚱뚱하다며 우리 동네 대표 덩치였던 나인데, 호치민 거리에는 나보다 키크고 골격 있는 여자들도 쉽게 눈에 띄었다. 물론 보통의 여성들은 나보다 훨씬 말랐다. 절대 오해하진 말길.

한 여름이 되면 강한 햇볕에 피부가 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하노이 도심의 젊은 여자들은 후드에 챙이 붙여있고, 긴팔의 끝에는 손등을 가리는 장갑이 달려있으며, 매년 유행에 따라 조금씩 디자인이 바뀌지만 간혹 후드의 끝에 마스크까지 부착되어 있는 각종 화려한 문양의 잠바를 입고 다녔다. 한여름 오토바이를 타는 하노이 여자들은 열에 아홉 이 잠바를 입고 다녔고, 때문에 도심위를 꽉 채운 오토바이 위에는 꽃 문양을 비롯한 화려한 패턴이 가득했다. 나와 한국 친구들은 이것을 일명 '개구리 잠바'라 불렀고, 간혹 한 둘은 이 잠바를 구입하여 입고 다녔었다. 마치 한여름에 입지 않으면 베트남 유행에서 도태되는 것만 같이. 그래서 나도 '이번 여행에 이 개구리 잠바를 하나 구입해서 입고 갈까?' 하는 생각도 했었는데 공항에서 시내로 나오는 길, 오토바이 위의 세련된 '호치민 신新여성'들을 보고는 나는 내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알고 금새 얼굴이 붉어졌다. 호치민시 어디에서도 '개구리 잠바'는 절대 찾을 수 없었고, '호치민 신新여성'들은 한국 옷마냥 세련된 후드 잠바나 자켓을 하나씩 걸치고 있었다.

쪼리를 신고 있는 것도 나 뿐이었다. 맹추위로 덜덜 떠는 하노이의 한 겨울에도 털잠바에 털모자에 목도리에 귀마개에 장갑까지 활용하여 무장을 하면서도 맨발로 혹은 엄지 발가락 양말에 쪼리나 슬리퍼를 신고 다니는 우리동네 사람들처럼 나도 늘 익숙해진 쪼리를 신고 여행을 다녔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역시 옷차림이나 뭐나 내가 이 호치민시티 안에서 가장 후질근한 사람인 것은 분명했다. 하노이에서 내려온 역 문화충격이랄까. 그 후로도 출장이다 여행이다 해서 여러번 호치민시를 들렀었는데, 매번 느끼는 것은 이곳이 하노이와는 완연히 다른 느낌의 베트남이라는 것이었다.




#2.
그리고 마지막으로 호치민시를 방문한 지 약 1년여 만에 다시 호치민시를 찾았다. 여행으로 말이다. 여행자 거리인 데탐 거리를 찾았다. 줄곳 호치민에 들를때마다 들렀던 5달러짜리 도미토리를 찾았지만 왠걸, 나의 단골 도미토리는 공사중이었다. 주변에 알고 있던 저렴한 숙소를 모두 찾았다. 상당수가 공사중이었거나 가격을 인상했다. 하노이와 마찬가지로 이곳도 여행자들로 몸살을 앓고 있구나. 빠른 변화가 내 입장에서는 반갑지만은 않았다. 무려 $7짜리 도미토리를 보여주는 삐끼 아주머니와의 베트남어 수다 끝에 120,000vnd($5.5)에 낙점. 최유리 죽지 않았어.

이제 오늘부터 배낭 여행자 모드다. 궁상맞게 아끼지만은 않았던 베트남 생활 물가에 익숙해진 탓에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꼭 필요한 소비만으로 다녀보겠다. 고생은 즐거운 거니까.




#3.
데탐 거리 근처에 유명한 벤탄시장 말고 구석진 시장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내가 늘 여행때 신고다니는, 다 떨어진 뉴발란스 트레킹화 하나를 신고 내려왔는데, 역시 무더위진 남부에서는 무리다. 쪼리를 하나 사러 시장을 돌아다녔다. 사람 한명이면 꽉 채워질 좁은 파티션 안에 온갖 신발들로 가득 쌓인채 할머니 한 분이 앉아계셨다. 하노이에서 사서 올 여름 내내 잘 신고 다니다가 개에게 물어 뜯겨버린 내 사랑스런 쪼리와 같은 것이 있었다. 하노이에서 사서 오려고 했지만, 아직 추위가 풀리지 않은 하노이 시장에선 많은 종류의 여름 신발을 찾을수는 없었다.

반가운 마음에 할머니에게 물었다.
"할머니, 이거 검정색 없어요?"

할머니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눈동자를 돌려 나를 쓰윽 바라보시더니, 퉁명스럽게 대답하셨다.
"없어."
"......;; 할머니, 그럼 이 색은 더 큰 사이즈 있어요?"
"없어."
"......:: 할머니, 그럼 이 건 더 큰 사이즈 있어요?"
"없어."
역시 쳐다보지도 않고 퉁명스럽게 답하신다. 하하하..!! 아, 난 왜 베트남 사람들의 이런 시니컬함이 재미있을까?

결국 옆 가게에서 분명 한달 내로 헤져 못신게 될 쪼리하나를 30,000vnd($1.5)에 샀다. 쩌어기 사람들 가득한 벤탄시장에서 처음에 부를 가격의 약 1/3 이다. 잘 샀다.

시니컬한 매력의 소유자, 신발가게 할머니





#4.
나는 여행중에 한국 음식을 별로 그리워 하지 않고, 사실 뭐든 입에만 넣으면 똑같이 느끼는 덕에 특별히 특정 음식을 찾아 다니는 경우는 별로 없다. 하지만 여행지에서 인도 음식점은 가끔 가곤 한다. 일단 한국에 있는 인도 음식점은 가격이 너무 비싼데다가, 동남아 대부분의 나라에는 중국계 화교와 인도인들이 엄청나게 진출해 있는 만큼, 원조의 그것과 비슷한 맛을 느낄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무엇보다 인도요리를 좋아하기도 하고 :)

예전에 가 봤던 호치민 모스크 앞의 무슬림 식당을 다시 찾았다. 퉁명스런 인도계 주인 할머니는 여전히 그대로였고, 일본 사람들이 많이 찾는 것도 그대로였지만 식당의 공간도 확장되었고, 인테리어도 바뀌었고, 가격도 올랐다. 인도음식을 한번도 안먹어본듯한 베트남 아르바이트 학생에게 주문과 함께 인도식 홍차인 '짜이'를 한잔 달라고 했더니, 돌아오는 질문.
"뜨거운 것으로 드릴까요? 찬 것으로 드릴까요?"
"...............음;;"

짜이가 차게도 마시는 음료였나??;;;; 순간 나는 멍 해진 상태로 한참을 고민을 하고 따듯한 것으로 달라고 했다. 음.. 하긴 여기는 안되는 것도 되는 것도 없는 베트남에 안되는 것도 되는 것도 없는 인도 식당이니 차가운 짜이가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모스크 앞의 휑하던 거리는 어떤식으로 입소문이 난건지 또다른 고급 무슬림 식당과 깔끔한 일본식당이 새롭게 나란히 들어섰다. 변화의 속도가 무섭다.

[Ha Noi] 하노이 공항에서 다시, 꿈꾸다

안녕, 하노이 노이바이 공항



#1.
탑승 대기 언제 다시 오게   모르는 하노이 공항이다정말 안녕이구나이별에 이별로 시작된 여행인지라마음이 무겁다. 하노이에서 한달짜리 여행 비자 받기에 실패한데다가, 2년간 정들었던 모든 인연들과 이별해야 하는 아쉬움으로부터 조금 떨어져, 일부러 멀리서부터 새로운 기분으로 시작해보고자 아래로 내려가려 한다. 하노이, 이별로부터 멀리 떨어진 사이공에서부터 새로운 마음으로 여행을 시작해야지. 


사실 막상 공항에 오니, 오랜만에 계획 없는 발걸음을 뗀다는 생각에 설레는 기분은 참을  없다. 나도 모르게 계속 웃음이 난다. 징그럽게 어울렸던 베트남이고징그럽게 어울렸던 베트남 사람들이지만 이렇게 여행자가 되어 바라보니 왠지 달라 보인다역시 모든 원인은나였구나 상황과  기억과 내가 만들어낸 근심과 괜한 우려들이 실존하는 모든 것을 다르게 판단하고 받아들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름과 다름을 구분할 수 있도록 현명해져야 한다.




#2.

2 다시 한국을 떠나기  많은 친구들이 고맙게도 필요한 물품들을 물어봐줬다어짜피 사람 사는 곳이기 때문에 생필품은  있다고 생각했고더군다나  앞으로의 2년의 생활은 사치스러워서는 안되는 삶이 었기에 어떤 선물이 필요하냐는 친구들의 질문에 선뜻 답을 하기 어려웠다그래서 언젠가 다시 여행자 신분이 될때 필요한 것들을 부탁했다 떨어진  오래된 그것을 대신할 배낭 커버, 꽤 오래된 정보들이지만 베트남 이곳저곳이 속속들이 나와있는 두꺼운 론리플레닛 가이드북작은 병에 담긴 스킨 샘플 여러 땀에도 지워지지 않는 썬크림 :)

그리고 친구들이 곱게 메시지를 적어  배낭 커버와 가이드북스킨 쌤플썬크림 등을 들고 본격적인 여행을 시작한다어쩌면 친구들이나에게  선물은 2년간 베트남에서  살아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떠나가야만 하는 오늘을 위한 선물일지도.


가장 저렴한 저가 항공을 이용하기위해 가방을 모두 기내 반입하기로 했다. 생활하더 짐들은 모두 한국으로 보내거나 직원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지금은 이번 여행을 위한 최소한의 짐만이 있다. 혹시나 너무 무거워서 수하물 요금을 더 내야할까 걱정하는 마음에 슬쩍 무게를 재봤다. 보조가방을 포함한 내 모든 짐의 무게는 '8kg'..!! 욕심을 버리고자, 열심히 들고 다녔던 dslr 카메라도 팔고 작은 미러리스 카메라로 바꾼게 마음의 짐을 가장 크게 덜어줬다. 대부분의 짐은 정말 최소화 되었고, 이전 여행보다 늘어난 것 이라곤 이번에 새로 장만한 1kg가 안되는 넷북 뿐이다. 여행이 길어질수록 집에 돌아와 그 여행기를 정리하기 힘들어진다는 경험하에, 이번에는 매일매일 글을 조금씩 써 볼 용도로 하나 장만했다. 베트남 2년에 대한 정리, 그리고 이 여행에 대한 기록과 생각도 열심히 정리해야겠다.






#3.
2년간 너덜너덜해진 베트남 가이드북 앞 장의 지도를 펼쳤다. 그간 내가 다녔던 곳에 하나하나씩 동그라미를 쳤다. 누가 베트남이 좁다고 했던가. 2년간 베트남 구석구석을 그렇게도 열심히 싸돌아 다녔건만, 나는 아직도 무수히 많은 지역에 동그라미를 표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베트남을 더 여행한다고 했을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같은 질문을 했다. 
"그렇게 많이 다녔으면서 또 베트남을 여행한다고? 다 가봤잖아?"



내가 베트남을 더 여행하고자 하는 이유는 첫번째, 군데 군데를 잠시 가 봤다고 해서, 그 지역을 그 나라를 여행했다고 말하는 것에 조심스럽다. 어떤 마을을 여행했다고 하더라도 때마다 분위기가 다르고, 날씨가 다르며 만났던 사람과 마주했던 경험이 다를터인데, 잠시 들러본 그것을 가지고 그 마을의 전부를 익힌냥 가봤다고 할 수 없는 이유다. 그래서 베트남을 모두 여행했다고는 할 수 없다. 게다가 아직은 못 가본 곳이 훨씬 더 많기 때문에 나 역시 새로운 곳에 대한 갈증은 있다. 나는 아직 많이 배고프다.



베트남을 여행하는 또다른 이유는 단순히 베트남과 베트남 사람들을 더 알아가고 싶은 마음에서다. 2년간 매일 매일 빠짐없이 베트남과 베트남 사람에 대한 새로운 것들을 배워왔다. 그리고 짧지만 약 한달여동안 더 많은 지역에 가서 더 다양한 베트남 사람들을 만나고, 가려졌던 지역에서의 새로운 베트남 문화를 느끼고, 그간 알지 못했던 숨겨진 이면을 더 느끼고 가고 싶었다. 그래서 다시 꿈꾸려 한다.






#4.
우스꽝스런 체크 반바지와 빨간 블라우스에 '롯데리아 점원스러운 체크 모자를 머리에 얹은경력이 오래 되지 않았는지 약간은 긴장하고 있는 'Viet Jet Air' 스튜어디스 언니들과 함께 탑승이 시작되었다. 개인적으로 베트남 내의 저가 항공(Jetstar, Mekong Air, Viet Jet)을 모두 타 봤지만, Viet Jet 언니들이 가장 친절한것 같다. 새로 생겨서 그런가..;; 

비행기 이륙. 지금 흘러나오는 곡은 paolo nutini의 'millo faces' 


베트남 국내선을 운영하는 새로운 저가항공사 VietJet Air





#5.
여행하면서..
- 느리게 걷자
- 느리게 먹자
- 화내지 말자
- 비교하지 말자
- 그러려니 하자
- 감사하자
- 안전하고, 건강하자
- 순간에 나태하지 말되, 서두르진 말자
- 웃자 :)



지금 읽고 있는 책 '아름다운 지구인, 플래닛워커'에서 절대로 걸어서만 살아가기를 시작한 존 프란시스의 결심을 듣고 그의 어머니가 전화로 이런 말을 한다.

"그래, 좋다. 하지만 정말로 행복한 사람은 구태여 행복하다고 말할 필요가 없단다. 말하지 않아도 드러나거든."

어쩌면 나는 여행을 통해 맹목적으로 행복을 찾아다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미 내 안의 행복을 보지 못한채. 나도 언젠가는 더이상 '나는 행복하다'고 말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경지에 오를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