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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22일 토요일

+ 나의 베트남 여행 목록

그간 돌아다녔던 나의 베트남 여행에 대해 정리해 보았다. 사진은 틈틈히 곳곳에 올려 놓았고, 글은 이곳 저곳에 써 놓았으나 아직 블로그에 정리해서 올리진 못했다. 모든 여행기가 그렇하듯, 돌아오자마자 쓸 수 있는 그 순간을 놓치면 나중에 쓰기란 더 어렵다. 틈틈히 정리해서 올리겠다. 베트남 여행기만이라도.





나의 베트남 여행기
_계속 여행 중이니 앞으로도 계속 업데이트 예정이겠죠?


<2010년>
201002 

Ha Noi

201003 

Ha Noi

201003 

Hoa Binh

201004 

Mt. BaVi <베트남-바비산> 하늘과 바람과 산과 바비우유 한 모금


201004 
Sapa <베트남-사파> 사파행 버스 - 
Bac Ha 


201005 
Ha Dong Silk Village


201007 
Ha Long Bay


201008 
Ha Long Bay - 
Ha Noi - 
Da Nang - 
Hoi An - 
Ha Noi 

201009 

HCMC - 
Tay Ninh - 
Muine <베트남-무이네> 내 이름은 '띠(Ti)'에요 - 
Na Trang <베트남-나짱> 나짱 옷 스러운, 나짱 옷과 같은...
              <베트남-나짱> 고독한 할아버지 여행자
              <베트남-나짱> 공정 다이빙에 대한 생각_ '다이빙 보트' 위에서 -

Da Lat - 
Na Trang


201010 
Da Nang - 
Quang Ngai - 
Hoi An - 
Da Nang

201010 

Da Nang - 
Quang Ngai - 
HCMC - 
Quang Ngai - 
Da Nang - 
Hoi An - 
Da Nang - 
Ha Noi

201011 

Mai Chau <베트남-마이쩌우> 착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

201011 

Bat Trang Craft Village

201012 

Mt. Phang Xi Pang - 
Sapa

201012 

Mai Chau




<2011년>

201101 
Mai Chau

201102 

Hue <베트남-후에> 특명, 하노이에서 벗어나라
       <베트남-후에> 귀찮아
       <베트남-후에> '여행'과 '혼자'의 상관관계
       <베트남-후에> '방향인식불가능병' 환자의 달려라 오토바이


201103 

Quang Ngai - 
Da Nang - 
Quang Nam

201104 

Huong Pagoda

201104 

Quang Ngai -
Da Nang

201104 

Hai Phong

201105 

Mai Chau

201106 

Mr.Tam Dao

201108 

DaNang -
Quang Nam - 
Da Nang

201108 

Phu Quoc - 
HCMC - 
Vinh Long -
Con Tho -
HCMC

201110 

Ha Giang

201110 

Mai Chau

201111 

Ha Noi

201112 

Son Tay - 
Ha Noi

201112 

Ha Noi




<2012년>

201201 
Ha Noi

201202 

Cau Treo (Border to Laos) - 
Vinh

201202 

HCMC - 
ChauDoc - 
SongTien (Border to Cambodia)

201202 

HCMC - 
Buon Ma Tuot - 
KonTum - 
DaNang - 
Ha Noi

201203 

Mai Chau - 
MocChau - 
Mai Chau - 
Na Meo (Border to Laos)


201208 
Mai Chau - 
Ha Noi

201212 
Ha Noi



<2013년>

201301 
HCMC - 
Ha Noi - 
Mai Chau - 
Ha Noi - 
Quang Tri - 
Ha Noi (to Luang Prabang, Laos)

201302
Phu Quoc -
HCMC -
Ha Noi

201304 
HCMC - 
Cu Chi - 
Ca Mau - 
Lam Dong - 
Quang Ngai -
Hoi An - 
Hue - 
Quang Tri - 
Ha Noi - 
Mai Chau - 
Ha Noi (to Luang Prabang, Laos)



<2014년>

201404 
Mai Chau

201405 
Trang An

201406 
Mt.Cuc Phuong

201407 
Binh Phuc

201408 
Mai Chau - 
Moc Chau - 
Son La - 
Dien Bien Phu

201410 
Quang Tri

201411 
Thanh Hoa


2014년 11월 21일 금요일

[Thanh Hoa] 불편한 진실, '1대1 아동결연 사업'을 만나다 (1)_

*시작하기에 앞서 특정한 단체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현재 다수의 한국 국제개발협력 엔지오들이 하고 있는 '1대1 아동 결연 사업'에 대한 속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글쓴이의 의도를 이해 바랍니다.


베트남어를 한다는 이유만으로, 같은 일을 했었다는 이유만으로, 베트남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너무도 따듯한 환대를 주신 보육원 스텝들. 선생님이자 엄마이자 멘토 역할을 하는 스텝들이 아이들을 대하는 모습은 내가 아는 그 어느 기관 중에서도 제일 진정성 있게 느껴졌다. 이 분들은 나와 함께 있는 이틀의 시간 내내 '당신이 와주어서 너무 즐겁다'는 말로 6시간 버스 이동의 피로를 싸악 녹게 해 주었다.   @Choi Yuri


얘기치 못했던 큰 환대와 무환 애정을 받고 돌아오는 여정. 학교에서 한 달여간 배운 베트남어보다 이틀간 보육원에서 만난 직원들, 아이들, 주민들과 더 많은 베트남어를 했다. 이렇게 길 위에서 더 잘 배우는 내가 굳이 책상 앞에 앉으려는 건 정말 욕심인 것인가도 싶다.

사실 내가 이번에 이곳을 더 가고 싶었던 이유는 '후원자와 아동을 일대일로 매칭 시켜준다는 '일대일 아동결연 사업'의 과정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이 방법은 후원자의 마음을 비교적 쉽게 끌 수 있는 방법이기에 실제로 많은 국제개발협력 엔지오에서 큰 사업 중의 하나로 진행하고 있다. 통계에 의하면 약 70%의 한국 엔지오에서 이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나 역시 오래전 첫 월급을 받았을때 '한X야씨 열풍'에 휩쓸려 아프리카에 있는 한 아이의 결연후원을 시작 했었다. 그러나 이 바닥에 발을 담근 뒤로, 그것이 절대 좋은 후원의 방법만은 아님을 알게되었다. 후원 받을 아이들 사진을 늘어놓고 기부자가 고르는 위치에 있는 것이 너무 불편하게 느껴졌고, 그 마을, 혹은 학교 안에서의 후원 받지 못하는 아이의 소외됨 역시 그냥 넘어가서는 안될 중요한 문제라는 걸 알게 되었다. 심지어는 한 가정의 형제 중에 누구는 후원을 받고 누구는 받지 못하는 사례들도 접하게 되었다. 정기적으로 후원자에게 보내지는 아이의 사진과 그림과 편지를 만들기 위해 현장에서 어떠한 과정이 걸쳐지는지도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런 과정을 거쳐 내 손에 오게 된 까만 피부의, 놀란 눈을 가진 아이의 사진과 메세지들이 더 이상 사람들에게 자랑거리가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된 순간 나는 큰 마음을 먹고 기부를 끊고 다른 방식의 후원으로 변경하였다. 나 역시 기부를 끊을때, 내가 만약 멈추면 아이의 식사와 학업이 당장이라도 멈춰질 것만 같아서 죄스럽고 미안했다. 하지만 엔지오에서 홍보하는 내용들 처럼 내가 후원하는 그 돈의 100%가 몽땅 그 아이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후원이 끊긴다고 아이에게 돌아가는 지원이 뚝 멈출리도 없는 것이다. 만약 그런 시스템이라면 이건 정말 시작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 * *


나는 이렇게 1대1 아동결연을 반대하는 사람 중에 하나이지만, 아직도 많은 단체들은 기본적으로 결연 사업을 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몸담고 있었던 단체는 '한 아이에게 주는 지원보다 가족이, 혹은 마을이 함께 지속적으로 잘 사는 것이 더 필요하다'라는 생각으로 역시 아동결연에 반대하는 입장이었기에, 나는 실제로 그 현장을 직접 경험할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 이번에 기회가 되어 다른 단체에서 각 마을의 결연 아동에게 지원을 하는 날에 함께 따라가보게 되었다.

이 날은 오전, 오후 통틀어 총 다섯개 마을을 가게 되었는데 내용은 이러했다. 미리 준비해 둔, 봉투에 든 5만동(2,500원 상당)과 쌀 15kg 한 포대, 치약, 과자, 세제 등 생필품을 담은 선물 봉지 하나를 한달에 한번 각 마을의 인민위원회, 혹은 마을 회관에 모인 아동들에게 전달을 하는 것이다. 부모 중 한명, 혹은 할아버지와 함께 온 아이도 있었으며, 혼자, 혹은 형제와 함께 온 아이도 있었다. 대부분 큼직한 자전거를 끌고 오지만, 간혹 밖에서 기다리는 형제, 혹은 친구가 오토바이를 타고 기다리기도 한다. 만약 직접 오지 못한 경우, 이달의 지원 내역은 다음 달로 누적 이월된다. 실제로 이날 못 만났던 아이들이 몇 있었는데, 후원아동이 두 명뿐인 한 마을에선 조금 멀리 떨어진 산 위에 집이 있고, 정신 이상인 아버지, 오빠와 함께 지낸다는 한 여자아이가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는 인민위원회 직원과 혼자 자전거를 끌고 온 나머지 한 여자아이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그 아이의 안부를 들을 수 밖에 없었다.

아이들이 한 곳에 모이면 테이블에 뺑 둘러앉아 명단이 적힌 종이를 돌린다. 그러면 아이들은 자기 이름을 찾아 서명을 한다. 초등학교에 이제 막 들어갔다는 아이는 간신히 자기 이름을 찾아 펜을 꽉 쥐어잡아 꾹꾹 눌러가며 자기 이름을 쓰고, 한창 멋부린 사춘기 청소년들 역시 후딱 서명을 마친다. 함께 온 어른들은 멀찌감치 의자에 앉아 지켜본다.

명단을 적은 아이들은 바로 문 밖으로 나가 한명씩 사진을 찍고 들어온다. 아주 소수의 아이들을 빼 놓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얼굴 가까이 내민 카메라 랜즈를 보며 긴장한 눈치다. 이 사진들은 후원 아동 관리용, 혹은 후원자에게 보낼 용도일텐데, 순간 내가 처음 후원했던 그 아이의 똥그랗게 긴장된 눈도 이렇게 찍혀 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복잡해졌다. 사무실 내 책상 앞에 놓은 아이의 인적사항 적힌 사진 카드를 보고 사람들이 물을 때마다 괜히 으쓱해졌던 내 과거가 정말 부끄러워졌다.

아이들이 모두 사진을 찍고 들어와 다시 한자리에 모이면, 지원금이 담긴 봉투를 각각 전달하고 그달의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들어보니 이곳에서는 일년 열두달 중에 두 달은 후원자에게 편지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프로그램이 있고, 나머지는 추석, 설, 연말.. 등의 명절 프로그램을 같이 하고, 나머지 한 두달은 이렇게 오늘처럼 함께 영상을 보거나 한단다.

정말 아이들에게 진심으로 대하는 것이 느껴지는 담당 직원 anh은 오늘 닉부이치치의 짧은 영상 두개를 준비해 왔다. 처음엔 팔 다리 없는 닉부이치치의 모습에 아이들도 어른들도 그저 신기한 듯 웃거나 당황해 했지만, 닉부이치치의 이야기가 늘어 갈수록 모두들 진지해 진다. 그가 스케이트 보드를 타고, 높은 곳에서 다이빙 하는 장면을 볼땐 아이들의 짧은 환호가 들리기도 했다. 영상을 본 후 Anh 은 아이들에게 소감을 묻고, 닉이 팔다리가 없지만 뭘 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아이들 자신이 닉 보다 더 가진 것은 무엇인지 대답을 이끌어냈다.

어떤 마을에선 대부분의 아이들이 집중도 잘하고, 직원이 묻는 말에 대답도 잘하는 데 반해, 어떤 마을에서는 아이들이 엎드려져 있거나 잡담을 하고, 질문에는 꿀먹은 벙어리에 눈도 잘 못마주친다. 연유를 찾아보니 후원 아이들을 선정하는 마을 인민위원회마다 선정기준이 다른 것이다. 어떤 마을은 빈곤 계층 중에 공부를 잘 하는 순으로 주고, 어떤 마을은 하위 빈곤 계층부터 순서대로 아이들을 선정한 것 같다.

각 마을에서 30분여간(오늘은 이례적으로 프로그램이 짧은 날이란다)의 결연활동이 끝나고, 모두 밖으로 나와 차에 실었던 쌀과 선물보따리를 받아간다. 대부분 타고온 큼직한 자전거 뒤에 싣고 가지만, 간혹 밖에서 기다리는 형제, 혹은 친구의 오토바이에 지원품을 실어 가기도 한다.

_ (2)화에 계속

2014년 11월 20일 목요일

[Thanh Hoa] 베트남의 스승의 날

어젯 밤 열시 십분, 미친듯이 달리던 버스는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휑한 1번 국도변에서 나를 내려줬다. 마중 나온 활동가 동생을 따라 마을 인민위원회에서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인 '냐 응이(Nha Nghi, 여인숙쯤 되는 숙소)'에서 하룻밤을 묶었다. 동생 녀석이 미리 말해둔 턱에 가져온 tam chu(땀쭈, 베트남에서 숙박을 할땐 어디든 여권이나 이 거주증을 맡겨야 한다)를 꺼낼 필요도 없었다. 아니 꺼내 보여줄 카운터나 관리인 따위 없었다. 너무 늦은 탓인지 인민위원회 뒷편의 큰 게스트 하우스에 인기척이라곤 없었고, 어둠속에서 나를 맞이하는 건 큰 개 세마리의 으르렁 거림 뿐이었다.. ㄷㄷㄷ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인 오늘, 동생이 활동하는 보육원에 가서 직원들과 반갑게 인사를 하고, 선물 보따리를 차에 가득 실은 차를 타고 5개 마을 탐방이 시작되었다. 하노이에서 출장온 직원 anh과 활동가 동생, 지역 DOLISA 공무원 아저씨, 왕년에 경찰이었다던 운전기사 아저씨, 그리고 마침 학교가 쉬는 날(스승의 날) 센터에 남아 있던 보육원 아이들 몇명이 따라나섰다.



마을에 도착하니 인민위원회 바로 옆의 마을문화회관 건물에선 시끌벅쩍 행사가 한창이었다. 스승의 날을 맞이하여 학교 측에서 주최한 아이들의 공연이 있었는데, 마을 유치원의 코흘리개 미취학 아동들부터 제법 잘 짜여진 공연을 선보인 중학생 들까지. 다채로운 공연이 이어졌다. 아이들은 베트남 전통 노래에 맞춰 춤을 추었는데, 나이와 성별에 관계없이 얼굴에 분칠을 하고 화려한 장식들을 했다. 








재밌는 것은 분명 모인 사람들 모두 베트남 주류 민족인 낑족(비엣족)임에도 불구하고 소수민족 의상을 입고 전통 춤을 흉내내는 것. 물론 전통적인 의상이나 춤과는 조금 다르게 변형되었지만, 베트남의 아이들이 자라면서 이런 학교 행사때 마다 소수민족 전통 의상과 춤을 접할 수 있다는 건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길거리마다 꽃을 사려는 아이들 천지다. 천정부지지로 오른 꽃값이지만 주머니에서 너도 나도 쌈지돈을 꺼낸다. 아이들의 돈은 한정되었다만 그래도 어떻게 좀 더 예쁘고 큰 꽃을 살 수 없을까 머리들을 굴려본다.



스승의 날에 학교는 분명 쉬지만 선생님들은 여기저기서 찾아온 학생들을 맞이하느라 바뻐 보인다. 물론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같은 동네, 혹은 가까운 동네에 살고 있기에 가능하기도 하다. 학교 근처엔 방황하는 아이들이 천지다. 꽃다발 증정 행사를 마치고 삼삼 오오 모여 길거리에서 놀 궁리를 한다.이 금쪽같은 학생들만의 휴일, 학교는 쉬지만 다들 집에는 가기 싫은 모양이다. 그리고 옛 스승을 찾아오는 기특한 베트남 청년들도 간혹 보인다.


2014년 11월 19일 수요일

[Thanh Hoa] 오랜만의 버스 여행

내일은 베트남 스승의 날이다. 얼마전에 있었던 베트남 여성의 날처럼 길거리엔 꽃을 파는 노점들이 늘어서고, 학교에선 학생들이 (조금 과하다 싶도록) 정성을 모아 거대한 꽃다발이나 조화 꽃 장식을 스승에게 선물한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이번주에도 선생님이 베트남어 수업을 또 쉰단다. 몇주 째 주 하루씩만 수업 하는 중.. ㅠㅠ

Quang Binh(꽝빙)성이 고향인 친구가 휴가를 받았으니 집에 같이 가자고 해서 계획을 세웠었으나, 갑자기 집에 사정이 생겨 다음으로 미뤘다. 지난 Quang Tri(꽝찌)성 여행에서 역시 (내 수많은 여행 역사에서 한번도 없었던) 4인실 침대칸 기차 탑승의 기회를 놓쳐버린 것을 아쉬워 했기에, 이번엔 문군이 직원에게 부탁해 며칠 전에 미리 표를 사주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결국 이번에도.. 흑흑 ㅠㅠ 4인실 침대칸 기차는 나와 연이 아닌가보다.

갑자기 생긴 긴 연휴 (백수가 무슨 연휴가 따로 있겠냐만은)를 어찌 보낼까 하다가 한번도 가보지 못한 Thanh Hoa(타잉화)성에 가기로 했다. 역시 그쪽에 있는 엔지오 활동가 동생에게 급 연락을 하고 미딩터미널에서 버스를 잡아타고 가는 길.

4인실 기차여행과 맞바꾼 침대 버스 안, 다행히 자리가 많이 남아 2층 창가의, 원하는 침대 의자에 착석(?)을 했는데 역시나 떠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지금 출발한다'는 베트남 차장 아저씨의 말은 한번도 지켜진 적 없는 희대의 거짓말..!! 하지만 몁십번을 속아도 믿게된다. 믿고 싶은 거겠지.. ㅎㅎ

그렇게 한참을 정차해 있는 버스 안에서 갑자기 내 앞자리 한 베트남 여학생이 노트와 펜을 들어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한다. 한참을 부동 자세로 그리고 또 그린다. 내 첫 여행이 생각난다. 나도 예전엔 그림 많이 그렸었는데..


자, 이제 다섯 시간만 자자. 모두 굳밤~

2014년 10월 12일 일요일

[Quang Tri] 빈둥빈둥, 꽝찌에서 돌아오는 길

기차에서 두 밤을 잤던 4박 5일의 Quang Tri(광찌) 여정 마무리. 하노이로 돌아가는 기차는 내가 빚을 내서라도 어떻게든 머리칸을 타보겠다고 다짐 했건만 결국 4인실은 커녕, 6인실 침대칸 마저 표가 없단다. 이른 아침부터 부슬비 맞으며 슬슬 걸어서 기차역까지 걸어왔건만, 너무도 당연한듯 퉁명스럽기 까지한 역무원 언니의 대답.. '오늘 일요일이잖아!!' ㅠㅠ 결국 나는 의자칸 표 한장을 사고야 말았다. 난 정말 머리칸 기차랑은 인연이 아닌가보다.

계획없이 며칠 하노이를 떠나겠다는 생각 뿐, 그리고 이번엔 홀로 있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 뿐, 특별히 뭘 할 생각은 없었다. Quang Tri라는 지역을 선택한 것도 그곳에서 일하던 NGO 활동가 동생들과, 예전에 몇번 가봤던 재활센터의 아이들을 다시 만나고 싶다는 단순한 이유에서 였다. 주말을 이용해 Quang Tri 북쪽에 위치한 Quang Binh의 '퐁냐 깨방 동굴'을 다녀올까도 생각했지만, 결국 훌쩍 어디론가 떠나기에는 나의 몸이 지친 탓(한국의 강행군을 마치고 하노이에 온지 열흘, 그리고 그 사이에 미얀마도 다녀왔다)에, 이번엔 동생들과 그냥 여린 센터와 동하에서 빈둥거리기로 했다.

일명 '먹고 자고'의 반복. 시장에 가서 식재료를 사다가 (집에서도 잘 안하는) 밑반찬을 만들어 동생네 냉장고를 채우고, 점심이고, 저녁이고, 디저트고 동네의 맛집이라는 곳을 며칠 내내 모두 탐방학고, 해가 지면 동하의 자랑이라고 동생들이 열심히 떠들어대는 뷰 포인트(그래봤자 하노이에서 온 녀자 눈엔 차지도 않지만 ㅋ) 에 가서 야경과 함께 맥주 한모금을 하고, 배가 부르면 동네를 걷다 들어와 잠에 드는 일상. 동하에 있는 삼일 내내 배가 불러 있었다..;;

여린현 재활센터 녀석들 @choi yuri

동하시 녀자들이 베트남에서 세번째로 크다고 자랑했던 '동하시장'.
믿거나 말거나 이지만, 베트남에서 세번째로 쥐가 많은 것은 분명 @choi yuri

왠지는 모르겠으나 '다코야끼'라는 이름이 붙여진 베트남 붕어빵.
반을 가르는 순간 베트남 음식 향(?)을 느낄 수 있음 @choi yuri

동하시 부자집안 결혼식, 하노이랑 좀 다른 느낌 @choi yuri

동하시에서 새로 찾은 후티에우 맛집 식당 @이수형



오랜만에 센터에 가서 아이들과 생각없이 깔깔대며 놀수 있어 좋았고, 활동가 동생들과 고민을 나누며 도란 도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좋았고, 나름 동하 시내 구석구석을 돌아다닐 수 있어 좋았고, 동하에서 먹을 수 있는 왠만한 건 몽땅 먹을 수 있어 좋았고, 마을에서 사투리 심한 사람들이랑 귀기울이며 이야기 나눌 수 있어 좋았다. 같은 베트남이지만, 내가 아는 베트남과 다른 새로운 것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것, '베트남은 무엇이다' 라고 감히 말하지 못하도록 스스로에게 겁을 주는 경험, 지금 나에겐 이게 큰 배움이다.


배웅해준다고 따라오는데, 같이 다니기 조금 창피한 '꽝찌 동하시 녀자들' @choi yuri

내가 참 좋아하는 동하역 노을 @choi yuri

하노이행 꼬리칸 기차 안. 다행히 지금 내 옆 의자엔 아무도 없다. 부디 하노이 역까지 이대로만 가주길. 에어컨을 더 세게 틀지도 않고, 앞 뒤 자리에서 라면과 도시락들을 더이상 먹지도 않고, 건너편 자리에서 한 청년이 휴대폰 스피커로 듣는 음악 소리를 더 키우지 않고, 곧이어 소등이 되면 내가 잠에서 깨지도 않고, 부디 한방에 '하노이'에 도착하길...

'무사히' 아침에 봅시당!!


2014년 10월 10일 금요일

[Quang Tri] 꽝찌행 설국열차, 내 인생에 4인실 침대칸은 없는 것인가?

표가 잔뜩 있을거라는 모두의 말만 믿고, 1년 반 만에 여유로이 하노이 기차역을 찾아 갔다. 하노이역도 많이 변해 있었다. 가장 놀라웠던 것은 기차표를 사기 위해 예전처럼 '무리 속에서 머리를 창구 안으로 쑤셔 넣어 티켓 판매 직원과 먼저 아이컨택 하는 싸움'을 더이상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었다. 무려 대기표 기계가 생겼다. 와아아아..!!



그런데 왠걸, 출발 두시간 전인데도 표가 6인실 3층(제일 좁고 추운 자리) 하나 남았단다. 학생 때는 당연히 돈을 아끼려 의자석이나 가장 싼 딱딱한 침대칸을 타고 다녔는데, 이제는 몸이 힘들어 조금 좋은 걸 타고 다녀보려 해도 늘 나에게 좋은 표는 주어지지 않았다. 이번에도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내 기차인생에 폭신폭신 깨끗한 4인실 표는 없구나.. ㅠㅠ

반신반의 남은 표 한장을 사고 기차에 올랐는데, 왠걸 정말 4인실 칸에 노랑머리의 서양인들이 그득이다. 내 자리를 찾아보니 열차 꼬리칸에 추가로 붙은 6인실 칸, 그것도 제일 끝 실이다. 정말 하나 남은 표라는 말에 신빙성이 생긴다. 바로 전까지 지나오며 느꼈던 여러개 이어진 4인실의 쾌적함이 내자리를 찾는 순간 어두침침하게 바뀐다. '양갱'이라도 만들어 먹어야 하나..



우리 칸에는 이미 4명의 베트남 가족들이 타 있다. 아저씨 한분, 건강한(손바닥으로 맞으면 엄청 아플것 같은?) 아줌마 둘, 그리고 다 큰 조카딸이 하노이의 센 억양에 엄청 큰 소리로 떠들면서 나를 맞이했다. 심지어 아줌마 한명은 내 쪽으로 다리를 쩍 벌리고 누워서 뭔가를 와작와작 씹으며 말했다. '네 자리는 쩌 위 3층이네. 올라갈 수 있겠어? 하하하하하' 뭐가 그리 신났는지 가족들이 모두 화통하게 웃자, 그들의 입 속에서 씹던 것들이 마구 튀어나왔다. 나는 '그럼요' 하면서 조용히 올라가 찌그러져 있기로 했다.

잠시 후 기차 복도에서 찐 옥수수를 파는 카트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줌마들이 마구 소리를 지르자, 아저씨는 한숨을 내쉬고는 일어나 옥수수를 사 왔다. 그러고는 팔뚝만한 옥수수를 내 얼굴 앞에 내밀었다. '이봐 친구, 이거 먹어.' 사실 옥수수를 좋아하지 않는 나는 거절하고 싶었지만, 순간 3층 침대에서 내려본 아저씨의 팔 전체에 엄청난 문신을 발견했다. 그리곤 그냥 받았다. '감사합니다(?)' 그냥 머리 맡에 두려 했으나 아저씨는 옥수수를 우적우적 씹어 먹는 시범을 보이며, 계속 먹으라 손짓을 했다. 할 수 없이 3층 침대에 불편하게 누운 채 엄청나게 큰 옥수수의 수염을 어렵게 벗기고 있는데 옥수수알 사이에 낀 애벌레를 발견하고 말았다. '맛있지?'라고 강요하며 묻는 아저씨의 눈빛에, 나는 결국 애벌레를 구석에 처치하고 나서야 좋아하지도 않는 옥수수를 맛있는 척 먹고 말았다. 인샬라, 옴마니반메훔, 할렐루야...

책을 보려 했으나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스피커에선 한참동안 신나는 베트남 뽕짝이 들렸고, 스피커가 잠잠해지자 아줌마와 아저씨가 번갈아가며 한곡조씩 뽐내기 시작했다. 책을 덥고 노래를 자장가 삼어 잠이나 청하려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절대 보지 말아야 할 것이 내 눈에 들고 말았다. 내 침대 벽을 기어가는 작은 바퀴벌레..!! 순간 나도 모르게 들고 있던 휴대폰으로 몇번이고 찍어 댔것만 애꿎은 벽만 두드리고 말았다. '보지말걸. 보지말걸. 못본걸로 하자. 못본걸로 하자..' 나는 여러번 되뇌이며 나에게 남은 표 한장을 건내줬던 하노이역 매표소 아줌마 얼굴을 떠올렸다. 인샬라, 옴마니반메훔, 할렐루야...



노래가 잠잠해지자 나는 취침 분위기 조성을 위해(혹은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지 않기 위해) 불을 껐다. 조금 이른 시간이었지만 다행히 모두들 눈을 감기 시작했다. 그리고 갑자기 두명의 젊은 남녀가 들어왔다. 어랏 뭐지? 한자리 남았는데?;;; 여자가 먼저 내 반대편 3층 침대로 올라가더니, 곧이어 남자가 따라 올라가는 게 아닌가. 2층의 오지랍 아저씨가 '너네 표 하나야?'라고 묻자, 남자가 비좁은 침대의 여자 옆에 나란히 누우며 말했다. '괜찮아요. 표가 하나 남았대서 하나만 샀어요.' 청년의 대답에 나만 빼고 모두들 꺼이꺼이 웃더니 다시 곧 잠잠해졌다. 잠시 후, 닫혀 있던 방 문이 철컥 하고 열리더니 역무원이 쓰윽 들여다보고 다시 나갔다. 괜시리 나는 심장이 뛰기 시작했는데,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잘도 자는 눈치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다시 잠에 청하려던 그때!! 문이 벌컥 하고 다시 열리더니 방금 전의 그 승무원이 나타나, 이번엔 고개를 방 안으로 조금 들이밀었다. 몇초가 몇분 같이 흘렀다. 다행히 승무원은 아무일 없다는 듯 다시 문을 닫았다. 남자의 그늘에 가려져 여자는 들키지 않았던 것이다. 아 뭐 이런 스팩타클한 ㅠㅠ 나 정말 설국열차라도 타고 있는 건가...

고난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나는 푹 잤다. 아직 녹슬지 않은 여행자용으로 최적화된 내 몸뚱이에 다시 한번 감사^^



침대실 안으로도 아침 해가 들었고, 하나 둘씩 사람들이 내리더니 6시쯤 되자 6인실에는 결국 나 혼자 남았다. 8시반이 되자, 갑자기 밤새 조용하던 기차 스피커에서 다시 노래가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첫마디가 '000한 꽝찌~ 000한 꽝찌~'로 시작하는 '꽝찌 찬가'가 크게 들리더니, 곧이어 꽝찌에 대한 설명이 주구장창 흘러나온다. 아 이 얼마나 기발한 생각인가!! 나는 꽝찌 찬가를 들으며 그렇게 꽝찌 동하역에 도착했다. 지난 밤, 너무 많은 일이 있었지만, 나는 그저 저 4인실 머리칸에 그득한 서양인들이 베트남어로 된 이 꽝찌찬가를 함께 듣지 못하는게 마음에 걸릴 뿐이었다. 이 기차에서 나만 웃는 이 상황이 너무 웃겼다.


하노이에서 Ga Dong Ha 동하역 (Quang Tri) 으로 가는 기차 안.


2014년 8월 28일 목요일

[Dien Bien Phu] '디엔비엔푸 전투' 개요

세계적으로 유명한 전쟁사 중 하나인 '보 응우엔 지압(Vo Nguyen Giap)' 장군의 '디엔비엔푸(Dien Bien Phu) 전투'가 올해로 60주년을 맞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각국이 식민지 지배가 시대착오적이며 비효율적인 지배 방식임을 인정했음에도 프랑스는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등의 인도차이나 반도에 대규모 군사간섭을 하며 식민 지배를 하려고 하면서 인도차이나 전쟁(베트남에서는 '항불 전쟁'이라 부른다)이 발발했다. 1946년부터 9년여간 벌어진 이 전쟁에서 가장 중요했던 마지막 전투는 베트남 북서부 라오스와 접경한 '디엔비엔푸(Dien Bien Phu) 전투'이다.

프랑스 군은 평야에 드문드문 산맥이 이어져 있는 작은 도시인 디엔비엔푸에 비행장을 건설하고 만오천명이 넘는 병력과 야포, 전차, 비행 중대 등을 배치시켰다. 그리고 베트남 게릴라들을 압박하고 북동쪽 라오스로 가는 길을 차단해 줄 뿐더러, 디엔비엔푸 시내가 다 보이기 때문에 전투 전체를 통제할 수 있는 중요한 언덕인 'A1 고지'를 요새로 만들었다


작전회의를 하는 호치민(좌), 지압 장군(가운데)과 장군들 / Dien Bien Phu 박물관  @최유리
1953년 겨울, 프랑스가 디엔비엔푸에 전투 태세를 갖추고 있는 동안에 '호치민'과 그의 오른 팔인 '지압 장군'은 베트남군에게 이동명령을 내린다. 이때, 베트남 군은 험준한 산악지형을 하루 80km씩 이동했다. 주간에는 프랑스 공군기의 시야를 피해 30km만 이동을 하고, 야간에 50km를 이동하였다.

그리고 독립의 열망을 품은 26만명의 인민들 역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하노이에서 군수물자를 들고 출발하여 700~1000km를 행군하였다. 20kg의 봇짐으로 시작한 그들은 디엔비엔푸에 도착한 후, 고작 2kg의 식량을 전달할 수 있었다. 병사 한명의 3~4일치의 식량을 위해 목숨을 걸고 걸었던 것이다. 그리고 인민들은 2만여대의 자전거와 말, 소를 이용해 식량 뿐 아니라 화포와 탄약까지 고지로 운반했다.

군수물자를 두 발로 나르는 인민들 / Dien Bien Phu 박물관  @최유리

그렇게 이동을 시작한지 3개월 하도고 20일이 된, 1954년 3월 13일 밤. 베트남 군은 디엔비엔푸 기지의 공격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36일간 밤낮으로 치열한 전투를 했는데, 전투의 승패를 가늠한 것은 바로, 중국과 구소련의 지원을 받았던 베트남군의 전략이었다. 베트남 군은 중국군이 한국전쟁에서 획득하여 베트남에 지원한 105mm 곡사포를 프랑스 군에게 중요한 고지인 'A1'에 조준 가능한 뒷쪽 산에 설치하고 포격을 했다. 그리고 스스로 만든 'A1 고지'에서 수세에 몰린 프랑스 군은 결국, 1954년 5월 6일 밤에 고지를 내주고 만다.

폭파 구덩이 / A1 고지  @최유리

그렇게 마지막 요새를 빼앗긴 다음 날인 5월 7일 5시 30분, 프랑스 사령관 '드 카스트리에'가 자신의 벙커에서 나왔고, 베트남 308 여단 투부 연대는 '독립의 언덕'에 승리의 깃발을 세웠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 군은 약 1만 1천여명이 항복을 했고, 약 5천여명이 전사했다. 이 전투를 끝으로 프랑스는 베트남 뿐 아니라 라오스, 캄보디아 등의 인도차이나 지배를 종결하게 되었다. 물론 완전한 통일을 이루지 못한 베트남은 같은 해 7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평화회의에서의 결정을 토대로 17도선을 경계로 남, 북이 분단된다.


2014년 8월 26일 화요일

[Mai Chau] '가족'은 '짱'을 걷게 만든다

빙 아줌마의 친 언니가 살고 있다는 옆 타이족 마을 트레킹을 하던 중, 열아홉의 장애우를 만났다. 만나는 사람마다 타이어로 안부를 묻던 아줌마는 어김없이 어디론가 뛰어가는 이 소녀에게도 반갑게 인사를 건냈다. 내가 소녀의 장애에 대해 묻자, 아줌마는 내가 전에 일하던 엔지오의 장애인 재활센터에 저만한 나이의 친구가 들어갈 수 있는지를 되물었다. 안타깝게도 나이가 많은 친구는 입소 제외 대상이었다.

소녀를 보다가 문득 뇌성마비를 앓고 있는 아줌마의 조카 '짱'이 생각났다. 다른 옆 마을에 살고 있는 '짱'이 어릴적에는 엄마 품에 안겨 자전거를 타고 와서 한번 만났었는데, 생각해보니 그 후로는 본 기억이 없었다. 알고 보니 8살이 된 짱의 몸이 너무 커버려서 집 밖으로 데리고 나오는 게 어려워진 것이다. 짱의 상태에 대해 이야기 하던 우리는 결국 다음 날 짱네 집에 놀러가기로 했다.

*

다음 날, 모기장 안에서의 늦은 기상. 이미 빙 아줌마는 아침 일찍부터 부지런을 떨어 짱네 가져갈 과자를 여러 봉지 사다 놓으셨다. 우리가 아이에게 할 수 있는 것은 없고 단지 놀러갈 뿐이라는 것을 여러번이나 어필했지만, 아줌마는 설레임은 감추지 못했다. 아마도 집안의 장애 아이를 보러 누군가 가준다는 사실만으로도 아줌마는 마냥 신난 듯 했다.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부슬비를 맞으며 도착한 짱네 집는 환하게 맞이해주시는 짱의 친할머니, 짱의 엄마, 그리고 집에서 손님을 처음 맞이한 짱과 4살난 짱의 여동생이 있었다. 며칠 몸이 아팠다는 짱은 낮선이의 방문에 곧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엄마 품을 찾았다. 우리는 짱이 우리에게 조금 떨어진 침대에서 할머니 품에 앉겨 진정이 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온가족의 관심과 사랑으로 난생 처음 물리치료를 받아보는 '짱'  @choi yuri


잠시 후, 진정이 된 짱을 눕히고 여기 저기 살펴본 결과, 다행히 작업치료사인 수형이 보기에 짱은 아직 몸이 많이 굳어 있지 않은 상태라고 했다. 거의 누워서만 생활하던 짱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아이가 다양한 것을 보면서 호기심을 가질 수 있게, 그래서 움직이고 싶은 마음을 스스로 가질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라는 수형의 말을 내가 베트남어로 통역하면, 내 베트남어를 빙 아줌마가 다시 타이어로 짱 엄마와 할머니에게 자세히 설명했다. 그리고는 짱을 매일 아침마다 맛사지 해주는 법, 앉혀서 밥을 먹이는 법, 두명이 잡고 아이에게 걷는 연습을 시키는 법을 모두 알려줬다. 엄마는 한번도 보지 못했던 진지한 표정으로, 그리고 긴장된 표정으로 이 모든 것을 열심히 듣고 익혔다. 할머니와 외숙모인 빙 아줌마도 옆에 앉아 동작 하나 하나를 열심히 새기고 거들었다. 짱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맛사지를 받는 내내 우리와 눈을 마주치며 밝게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타이족 전통집의 넓은 대나무 마루를 두번이나 걸은 뒤, 온몸이 땀범벅이 되고 나서야 어렵게 한마디 뱉었다.

"놀러 나가요!"

한시간도 채 안되는 치료가 아이를 웃고, 걷고 싶게 만들었다.
짱은 연신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계속 걷는 연습을 하고싶어 했다.
@choi yuri


*

아까부터 한쪽 구석에 있는 어린 동생 마이(Mai)의 표정이 마음에 걸린다. 과자를 줘봐도, 장난을 쳐봐도, 무릎 위에 앉혀봐도 미동이 없다. 아이답지 않게 줄곧 어두운 표정이던 아이는 엄마가 언니의 맛사지를 다 하고 나자 슬쩍 엄마 무릎 위로 옮겨 앉았다. 엄마가 언니의 걷기 연습을 다시 도와주기 시작하자, 나는 아이를 번쩍 들어 안아 집 이곳 저곳을 걸으며 말을 걸어본다. 하지만 여전히 녀석은 무표정에 온몸이 굳어 있다. 아이를 안은 채 멀리서 바라보니, 짱을 둘러싸고 수형과 엄마와 할머니와 작은 엄마가 애정을 담아 아이를 바라보고 있다. 짱 당장 앉은뱅이 보조 의자나 보행기나 휠체어를 가질 순 없지만, 그래도 이 마을의 유일한 장애 아동인 짱에겐 이렇게 애정과 사랑을 가져주는 가족들이 있고, 틈만나면 들여다 보는 친척들이 있고, 창문 밖에서 오다 가다 말 걸어주는 이웃들이 있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아직 4살 밖에 안된 요 녀석은 조금 안됐다는 생각이 들 때쯤, 누워 있던 짱이 다시 한마디 내뱉는다.
"내 동생 어딨어요?"

장애가 있는 언니에게 가족들의 관심이 쏠린 탓에 고작 네살인 마이의 표정은 밝지 않다  @choi yuri


*

마을을 나서자 갑자기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어느 가게 처마 밑에 서서 비가 그치길 기다리지만 빗줄기는 점점 더 거세진다. 아무래도 마이쩌우에 하루 더 묵으라는 뜻인가 보다. 시장 옆 의자에 앉아 오늘 가려던 목쩌우는 내일로 미루겠다고 말하자, 빙아줌마의 얼굴에 어김없는 함박 웃음이 번진다. 비도 마음도 참 시원하다.

마을 슈퍼 의자에 한참을 앉아 들었던 빗소리 @choi yuri


2014년 8월 25일 월요일

[Mai Chau] 시골 마을에 써커스 공연단이 떴다

지난 몇년 간 내가 이 마을을 들락날락 한지 십수번 만에 두번째로 조용한 밤을 맞이했다. 떼로 와서는 마을 공터에서 밤 늦도록 가라오케를 미친듯이 틀던 하노이 사람들도 없었고, 타이족 전통 공연을 보겠다고 신청한 여행자들도 전혀 없었다. 모처럼의 조용하고 평화로운 락 마을에서의 저녁 식사를 하는데, 이 집의 11살 조카 '단' 녀석이 아까부터 동생을 임신한 배불뚝이 엄마에게 뭔가를 계속 조른다. 배불뚝이 엄마는 안된다며 난처해 학고, 역시 작은 엄마인 빙 아줌마도 옆에서 웃기만 할 뿐 아이에게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다. 거의 울상인 '단'의 모습에 연유를 알아보니 오늘 읍내에서 하는 원숭이 쇼에 가고 싶다고 조르는 것이었다. 동네 꼬마들과 산에 오르거나, 소, 물소, 닭, 개, 고양이와 논밭에서 뒹구는 것이 전부이 녀석에게 정체모를 이 쇼가 일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귀한 문화 생활이라는 걸 알기에, 임신 7개월 엄마와 감기로 누워있는 아빠, 바쁜 어른들 대신에 쑥스러워 눈도 잘 못 마주치는 단 녀석을 데리고 읍내에 가기로 했다.

밤 8시, 이곳은 이미 껌껌해진지 오래, 오토바이를 조심스레 몰고 사람들의 행렬을 따라갔다. 마이쩌우 읍내의 운동장에는 밖에서는 안 보이도록 천막을 치고 어린이는 무료, 성인은 2천원으로 입장을 받고 있었다. 일부 어른들은 아이들만 안으로 들여 보낸 채, 천막으로 가려진 입구 밖에서 오토바이에 앉아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중 아는 얼굴의 몇 아줌마들이 나에게 들어가서 자신의 아이 누구를 잘 좀 봐달라고 부탁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락 마을 어른 대표의 신분으로 입장을 하게 되었다.

*



안으로 들어가 제일 앞자리 바닥에 자리를 잡고 나니,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몇번 봐왔던 떠돌이 쇼가 펼쳐진다. 단이 계속 말하던 원숭이 쇼라는 게 뭔가 확실히 짐작이 오지 않았었는데, 소림사 무술을 아슬아슬하게 따라하는 차력사 아저씨, 불붙은 굴렁쇠를 온몸에 굴리는 반쯤 벗은 아줌마, 외통나무 위에서 균형을 맞추는 젊은 여자, 나이 때문인지 술 때문인지 손을 심하게 떠는 할아버지 마술사 등 흔히 써커스단에서 볼 수 있는 쇼와 원숭이, 구렁이, 악어 등의 조련된(그러나 완전히 조련되지 않은) 동물의 조금은 징그럽고 위험한 서커스였다. 그리고 빠지지 않아야 할 것 또 한가지. 바로 쇼 중간중간 진행되는 물건 판매 타임! 이 쇼에서는 사이공 가수들의 노래모음 음반과, 행운을 부른다는 가짜 종이 돈이 단돈 10,000동(500원)에 판매 되었다. 저걸 누가 살까 싶었는데, 더 놀라운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저걸 샀다는 사실이다.



*

게 중에 오늘 최고로 충격적인 장면은 이미 무대에 오르기 전부터 무대 뒤에서 여러 번 매를 맞은 원숭이가 (단이 무대에 누가 올라오던, 무대 뒤 원숭이만 찾는 탓에 우연히 목격한 장면들) 조련사의 계속되는 철봉 매달리기 요구에, 갑자기 무대를 뛰쳐 내려온 것. 순식간에 공연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무대 아래서는 조련사와 남자 스태프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원숭이를 포위한 채, 결국 잡아버리고 말았다. 순간 이렇게라도 원숭이가 저 산속 깊숙히 도망가길 바랬지만 결국 녀석은 다시 무대 위로 끌려 올라와 역기 들기 등의 나머지 공연을 마쳤고, 그 후에는 다시 무대 뒤 철장에 갇히고 말았다.




그리고 또 하나의 충격 장면. 구렁이쇼라며 구렁이를 몸에 감거나 뽀뽀하는 장면은 티비에서 여러 번 봤어도, 차력사가 자기 입 안 깊숙히 구렁이 머리를 통채로 집어 넣는 장면은 참... ㅠㅠ



*

돌아오는 길. 원하던 원숭이를 실컷 본 단 녀석은 뭐가 그리 신난지 오토바이 위에서 연신 헤죽헤죽 웃어대며 나를 쳐다봤다. 과한 잔인함과 비인간적인 모습들에 저게 과연 아이들에게 보여줘야 하는 것일까 라는 생각이 여러번 들었지만, 그래 네가 그렇게 신났다면야 뭐. 무려 열시 반이 넘어 집에 돌아온 우리는 피곤함에 바로 뻗어버렸다.


2014년 8월 24일 일요일

[Mai Chau] '마을'은 아이를 자라게 한다


인간만을 위한 길이란건 본디 없었다 @Choi Yuri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락마을 입구 풍경 @choi yuri


물소는 목욕중? 수영중? 배변중? @Choi Yuri



부지런한 닭은 이미 새벽 4시부터 울어 재끼기 시작했지만, 지난 하루가 피곤했는지 나는 닭소리를 자장가 삼아 느릿느릿 모기장 밖으로 나왔다.

아침 9시. 사람들은 어디에선가 각자 자기 몫의 일을 하고 있다. 논을 돌보는 할머니와 혹 아저씨, 수레에 여물 가득 끌고 가는 옆집 아저씨, 집안 곳곳의 청소를 마치고 마당에 떨어진 낙엽을 능숙하게 쓸어 담는 빙 아줌마, 그리고 이미 아침 일을 마치고 시원하게 씻고 쉬는 할아버지.. 그러나 어느 누구도 서두르는 사람이 없다. 이 마을에서 과하게 늦은 아침을 맞이한 이들은 우리밖에 없는데도, 아침잠 많은 나를 잘 아는 빙 아줌마는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냐 하신다. 그리곤 거한 아침상을 바로 차려주실 기세다. 역시 이곳에 온 뒤로 무럭무럭 살찌는 소리가 들린다.


옆마을 산책 중 만난 탈곡기. 마을마다 추수가 한창이다 @Choi Yuri


그러고보니 내내 들리던 아이들의 웃음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꼬맹이들은 이미 학교에 간 모양이다. 한 아저씨가 아기를 태운 유모차를 끌고 지나가자 마을 곳곳 어딘가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온 사람들이 아이에게 말을 걸어준다. 덕분에 아버지는 몇걸음 가지 못한 채 유모차를 연신 이웃의 집앞에 세운다. 이곳에서 아이는 어느 누구 집의 아이가 아니라 마을의 아이이다. 뛰 놀다가 누구네 집에 가서 밥을 먹기도 하고, 대문 없는 아무네 집에 들락날락 거리기는 예사다. 아이를 좋아하는 나를 보고 빙 아줌마가 아기를 언제 가질 거냐고 묻는다. '아기를 가지게 되면 내 일을 아무것도 못할까' 하는 요즘 젊은 엄마들의 그것과 같은 내 고민을 듣고, 아줌마는 쿨하게 이야기 한다. 

"괜찮아. 애들은 6개월, 아니 1년 지나면 풀어놓고 엄마 일 봐도 돼!"

정말 이곳에선 가능할 것 같다. 아이가 집 밖을 기어도 차나 오토바이 같은 오염되고 위험한 것들을 찾기는 쉽지 않고, 마을 어디를 돌아다니든 내 아이에게 눈 마주치고 말 걸어줄 사람들은 천지. 이런 곳에서 아이를 키우면 나 혼자 내 아이를 온전히 책임져야 한다는 육아 부담이 적겠다는 생각을 하던 중, 빙 아줌마가 한마디 더 내뱉는다.

"엠링~ 아기나면 여기 데리고 와~!"

으하하하하. 말만이라도 '깜언'. 조금씩 든든해진다.


내가 이곳에 오래 있으면 안되는 이유, 매끼 이런 식사를 차려주시니 정말 살 찌는 소리가 들린다  @Choi Yuri


2014년 8월 7일 목요일

[Ninh Binh] 천년 나무를 찾아서, 꾹프엉(Cuc phuong) 국립공원












@all photo by Choi Yuri


'꾹프엉 국립공원'에서 천년이 넘은 나무를 만나고 왔다. '정말 천년을 살았을까' 하는 의심 반 호기심 반으로 나무를 만나러 가는길. 찐득찐뜩 습하면서도 맑고 시원한 공기를 느끼며 걷다 보니, 어느새 내 몸뚱만한 나무 뿌리를 가진 거대한 나무가 나타났다. 그 뿌리와 뿌리 사이에 서자, 앞으로의 내 남은 '반백년 인생'이 너무도 별볼일 없다는 것이 다시 한번 느껴졌다.

천년이나 살아온 이 나무 앞에서 고작 한백년도 살지 못하는 인간들이 '감히' 아옹다옹 하며, 남의 것 탐내며, 투정 부리며 살 게 뭐 있을까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