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가 잔뜩 있을거라는 모두의 말만 믿고, 1년 반 만에 여유로이 하노이 기차역을 찾아 갔다. 하노이역도 많이 변해 있었다. 가장 놀라웠던 것은 기차표를 사기 위해 예전처럼 '무리 속에서 머리를 창구 안으로 쑤셔 넣어 티켓 판매 직원과 먼저 아이컨택 하는 싸움'을 더이상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었다. 무려 대기표 기계가 생겼다. 와아아아..!!
그런데 왠걸, 출발 두시간 전인데도 표가 6인실 3층(제일 좁고 추운 자리) 하나 남았단다. 학생 때는 당연히 돈을 아끼려 의자석이나 가장 싼 딱딱한 침대칸을 타고 다녔는데, 이제는 몸이 힘들어 조금 좋은 걸 타고 다녀보려 해도 늘 나에게 좋은 표는 주어지지 않았다. 이번에도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내 기차인생에 폭신폭신 깨끗한 4인실 표는 없구나.. ㅠㅠ
반신반의 남은 표 한장을 사고 기차에 올랐는데, 왠걸 정말 4인실 칸에 노랑머리의 서양인들이 그득이다. 내 자리를 찾아보니 열차 꼬리칸에 추가로 붙은 6인실 칸, 그것도 제일 끝 실이다. 정말 하나 남은 표라는 말에 신빙성이 생긴다. 바로 전까지 지나오며 느꼈던 여러개 이어진 4인실의 쾌적함이 내자리를 찾는 순간 어두침침하게 바뀐다. '양갱'이라도 만들어 먹어야 하나..
우리 칸에는 이미 4명의 베트남 가족들이 타 있다. 아저씨 한분, 건강한(손바닥으로 맞으면 엄청 아플것 같은?) 아줌마 둘, 그리고 다 큰 조카딸이 하노이의 센 억양에 엄청 큰 소리로 떠들면서 나를 맞이했다. 심지어 아줌마 한명은 내 쪽으로 다리를 쩍 벌리고 누워서 뭔가를 와작와작 씹으며 말했다. '네 자리는 쩌 위 3층이네. 올라갈 수 있겠어? 하하하하하' 뭐가 그리 신났는지 가족들이 모두 화통하게 웃자, 그들의 입 속에서 씹던 것들이 마구 튀어나왔다. 나는 '그럼요' 하면서 조용히 올라가 찌그러져 있기로 했다.
잠시 후 기차 복도에서 찐 옥수수를 파는 카트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줌마들이 마구 소리를 지르자, 아저씨는 한숨을 내쉬고는 일어나 옥수수를 사 왔다. 그러고는 팔뚝만한 옥수수를 내 얼굴 앞에 내밀었다. '이봐 친구, 이거 먹어.' 사실 옥수수를 좋아하지 않는 나는 거절하고 싶었지만, 순간 3층 침대에서 내려본 아저씨의 팔 전체에 엄청난 문신을 발견했다. 그리곤 그냥 받았다. '감사합니다(?)' 그냥 머리 맡에 두려 했으나 아저씨는 옥수수를 우적우적 씹어 먹는 시범을 보이며, 계속 먹으라 손짓을 했다. 할 수 없이 3층 침대에 불편하게 누운 채 엄청나게 큰 옥수수의 수염을 어렵게 벗기고 있는데 옥수수알 사이에 낀 애벌레를 발견하고 말았다. '맛있지?'라고 강요하며 묻는 아저씨의 눈빛에, 나는 결국 애벌레를 구석에 처치하고 나서야 좋아하지도 않는 옥수수를 맛있는 척 먹고 말았다. 인샬라, 옴마니반메훔, 할렐루야...
책을 보려 했으나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스피커에선 한참동안 신나는 베트남 뽕짝이 들렸고, 스피커가 잠잠해지자 아줌마와 아저씨가 번갈아가며 한곡조씩 뽐내기 시작했다. 책을 덥고 노래를 자장가 삼어 잠이나 청하려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절대 보지 말아야 할 것이 내 눈에 들고 말았다. 내 침대 벽을 기어가는 작은 바퀴벌레..!! 순간 나도 모르게 들고 있던 휴대폰으로 몇번이고 찍어 댔것만 애꿎은 벽만 두드리고 말았다. '보지말걸. 보지말걸. 못본걸로 하자. 못본걸로 하자..' 나는 여러번 되뇌이며 나에게 남은 표 한장을 건내줬던 하노이역 매표소 아줌마 얼굴을 떠올렸다. 인샬라, 옴마니반메훔, 할렐루야...
노래가 잠잠해지자 나는 취침 분위기 조성을 위해(혹은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지 않기 위해) 불을 껐다. 조금 이른 시간이었지만 다행히 모두들 눈을 감기 시작했다. 그리고 갑자기 두명의 젊은 남녀가 들어왔다. 어랏 뭐지? 한자리 남았는데?;;; 여자가 먼저 내 반대편 3층 침대로 올라가더니, 곧이어 남자가 따라 올라가는 게 아닌가. 2층의 오지랍 아저씨가 '너네 표 하나야?'라고 묻자, 남자가 비좁은 침대의 여자 옆에 나란히 누우며 말했다. '괜찮아요. 표가 하나 남았대서 하나만 샀어요.' 청년의 대답에 나만 빼고 모두들 꺼이꺼이 웃더니 다시 곧 잠잠해졌다. 잠시 후, 닫혀 있던 방 문이 철컥 하고 열리더니 역무원이 쓰윽 들여다보고 다시 나갔다. 괜시리 나는 심장이 뛰기 시작했는데,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잘도 자는 눈치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다시 잠에 청하려던 그때!! 문이 벌컥 하고 다시 열리더니 방금 전의 그 승무원이 나타나, 이번엔 고개를 방 안으로 조금 들이밀었다. 몇초가 몇분 같이 흘렀다. 다행히 승무원은 아무일 없다는 듯 다시 문을 닫았다. 남자의 그늘에 가려져 여자는 들키지 않았던 것이다. 아 뭐 이런 스팩타클한 ㅠㅠ 나 정말 설국열차라도 타고 있는 건가...
고난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나는 푹 잤다. 아직 녹슬지 않은 여행자용으로 최적화된 내 몸뚱이에 다시 한번 감사^^
침대실 안으로도 아침 해가 들었고, 하나 둘씩 사람들이 내리더니 6시쯤 되자 6인실에는 결국 나 혼자 남았다. 8시반이 되자, 갑자기 밤새 조용하던 기차 스피커에서 다시 노래가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첫마디가 '000한 꽝찌~ 000한 꽝찌~'로 시작하는 '꽝찌 찬가'가 크게 들리더니, 곧이어 꽝찌에 대한 설명이 주구장창 흘러나온다. 아 이 얼마나 기발한 생각인가!! 나는 꽝찌 찬가를 들으며 그렇게 꽝찌 동하역에 도착했다. 지난 밤, 너무 많은 일이 있었지만, 나는 그저 저 4인실 머리칸에 그득한 서양인들이 베트남어로 된 이 꽝찌찬가를 함께 듣지 못하는게 마음에 걸릴 뿐이었다. 이 기차에서 나만 웃는 이 상황이 너무 웃겼다.
하노이에서 Ga Dong Ha 동하역 (Quang Tri) 으로 가는 기차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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