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으로 유명한 전쟁사 중 하나인 '보 응우엔 지압(Vo Nguyen Giap)' 장군의 '디엔비엔푸(Dien Bien Phu) 전투'가 올해로 60주년을 맞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각국이 식민지 지배가 시대착오적이며 비효율적인 지배 방식임을 인정했음에도 프랑스는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등의 인도차이나 반도에 대규모 군사간섭을 하며 식민 지배를 하려고 하면서 인도차이나 전쟁(베트남에서는 '항불 전쟁'이라 부른다)이 발발했다. 1946년부터 9년여간 벌어진 이 전쟁에서 가장 중요했던 마지막 전투는 베트남 북서부 라오스와 접경한 '디엔비엔푸(Dien Bien Phu) 전투'이다.
프랑스 군은 평야에 드문드문 산맥이 이어져 있는 작은 도시인 디엔비엔푸에 비행장을 건설하고 만오천명이 넘는 병력과 야포, 전차, 비행 중대 등을 배치시켰다. 그리고 베트남 게릴라들을 압박하고 북동쪽 라오스로 가는 길을 차단해 줄 뿐더러, 디엔비엔푸 시내가 다 보이기 때문에 전투 전체를 통제할 수 있는 중요한 언덕인 'A1 고지'를 요새로 만들었다.
작전회의를 하는 호치민(좌), 지압 장군(가운데)과 장군들 / Dien Bien Phu 박물관 @최유리 |
1953년 겨울, 프랑스가 디엔비엔푸에 전투 태세를 갖추고 있는 동안에 '호치민'과 그의 오른 팔인 '지압 장군'은 베트남군에게 이동명령을 내린다. 이때, 베트남 군은 험준한 산악지형을 하루 80km씩 이동했다. 주간에는 프랑스 공군기의 시야를 피해 30km만 이동을 하고, 야간에 50km를 이동하였다.
그리고 독립의 열망을 품은 26만명의 인민들 역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하노이에서 군수물자를 들고 출발하여 700~1000km를 행군하였다. 20kg의 봇짐으로 시작한 그들은 디엔비엔푸에 도착한 후, 고작 2kg의 식량을 전달할 수 있었다. 병사 한명의 3~4일치의 식량을 위해 목숨을 걸고 걸었던 것이다. 그리고 인민들은 2만여대의 자전거와 말, 소를 이용해 식량 뿐 아니라 화포와 탄약까지 고지로 운반했다.
군수물자를 두 발로 나르는 인민들 / Dien Bien Phu 박물관 @최유리 |
그렇게 이동을 시작한지 3개월 하도고 20일이 된, 1954년 3월 13일 밤. 베트남 군은 디엔비엔푸 기지의 공격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36일간 밤낮으로 치열한 전투를 했는데, 전투의 승패를 가늠한 것은 바로, 중국과 구소련의 지원을 받았던 베트남군의 전략이었다. 베트남 군은 중국군이 한국전쟁에서 획득하여 베트남에 지원한 105mm 곡사포를 프랑스 군에게 중요한 고지인 'A1'에 조준 가능한 뒷쪽 산에 설치하고 포격을 했다. 그리고 스스로 만든 'A1 고지'에서 수세에 몰린 프랑스 군은 결국, 1954년 5월 6일 밤에 고지를 내주고 만다.
폭파 구덩이 / A1 고지 @최유리 |
그렇게 마지막 요새를 빼앗긴 다음 날인 5월 7일 5시 30분, 프랑스 사령관 '드 카스트리에'가 자신의 벙커에서 나왔고, 베트남 308 여단 투부 연대는 '독립의 언덕'에 승리의 깃발을 세웠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 군은 약 1만 1천여명이 항복을 했고, 약 5천여명이 전사했다. 이 전투를 끝으로 프랑스는 베트남 뿐 아니라 라오스, 캄보디아 등의 인도차이나 지배를 종결하게 되었다. 물론 완전한 통일을 이루지 못한 베트남은 같은 해 7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평화회의에서의 결정을 토대로 17도선을 경계로 남, 북이 분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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