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무지하게 좋았던 어느 가을날, 가을을 시작하는 비가 며칠째 보슬보슬 내렸고 덕분에 한결 깨끗해진 바닥과 공기는 하노이에서 정말이지 쉽게 느낄 수 없는 '상쾌'라는 단어를 생각나게끔 해주었다. 나는 어디서 얻은 거추장스러운 귀빈용 장우산 하나를 쓰고 오랜만에 호앙끼엠 중고 카메라 상가를 찾았다. 평생 다시는 주인을 못 만날 '골동품' 같은 먼지 쌓인 카메라들이 뭐가 좋다고 나는 또 침을 흘리면서 '참을인(忍)자' 셋을 되새기며 조그만 카메라 가게들을 어슬렁 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이집 저집 괜히 들락날락 거리며 카메라 가게 아저씨들과 인사만 수번째, 갑자기 길거리에서 왠 건장한 흑인 남성이 영어로 말을 걸어왔다.
"실례합니다. 혹시 그 우산 어디서 사셨어요?"
혹시나 내가 빠른 영어를 못알아 들을까, 고맙게도 천천히 또박또박 말을 걸어왔다. 와우, 저사람 눈에는 이렇게 무겁고 거추장 스러운 우산조차 탐나 보이는 구나. 갑자기 들고 있는 우산에 양 어깨가 으쓱해졌다. 내 우산을 한참 바라보며 부러운 눈길을 보내는 그를 데리고, 나는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있는 큰 마트까지 함께 걸으며 안내를 했다.
그의 이름은 무싸(musa). 통성명을 하고, 이런 저런 대화 중에 내가 베트남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안 그는 무척이나 놀랬다. 알고보니 그는 이미 하노이에 10년 이상 산, 아프리카 '수단' 사람이었다. 타지에서 같은 처지의 외국인을 만나서였을까 10년동안 구하지 못한 우산을 살 수 있다는 기쁨에서였을까 무싸는 유독 우리가 베트남 사람이 아닌 것을 반가워했다. 나도 덩달아 왠지 반가워졌다.
무싸는 사업을 하고 인근의 외국인 아파트에 살고 있는데, 그 아파트의 위치와, 하고 다니는 복장 등을 고려해 볼때 베트남의 최상류층 정도의 생활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런 브르주아 외국인이 10년동안 우산 하나 못샀다니;;; 아주 기초적인 베트남어만 하는 무싸가 2년된 나의 서바이벌 엉터리 베트남어를 보고 부러워하며 말했다.
"베트남은 비 아시아권 사람, 특히 흑인들은 살기 참 어려운 나라야. 베트남 사람들과 어울리기도 힘들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도 불편해. 그래서 10년 넘게 살았지만 베트남어는 못춧(조금) 할 수 있어."
하긴 아직도 하노이에서 흑인이 길거리를 지나가기라도 하면, 오우우우 하는 괴성들을 내며 다들 놀래하거나 괴물이라도 본듯 일제히 뚫어지게 쳐다 보니까 아프리카계 흑인인 무싸의 심정을 이해 못할 것도 없다. 영미권 흑인도 아니고, 정말 머나먼 아프리카에서 어떻게 이곳 하노이까지 오게 되었는지 무싸에게도 참 많은 사연이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베트남은 다른 외국인에 비해 한국인이 유독 살기 좋은 나라라는 생각을 다시금 상기했다. 적어도 하노이나, 호치민 등의 도심에서는 한국인이어서 득이 되는 게 더 많으니까. 감사하며 살아야겠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
블로그의 글과 사진을 퍼가실때는 미리 동의를 구해주시고, 비방이나 욕설은 삼가 바랍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