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11일 금요일

결국 다시 와버렸다

#1.
2014년 4월 11일, 앞으로 이 날은 평생 나에게 잊을 수 없는 날이 될 것이다.

서로 애써 태연한 척 하다가 한국을 떠날 날이 며칠 앞으로 다가온 어느날, 엄마가 결국 눈물을 보이며 속내를 털어 놓으셨다. 하나뿐인 딸을 돌아올 기약 없는 타국으로 보내는 그 아쉬움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만은. '하노이-인천 간의 비행시간이 서울-부산 간의 버스 시간이랑 비슷하다. 아니 더 적게 걸린다, 자주 올수 있다, 한국에서 보다 자주 연락할거다, 비행기 표 값은 항상 통장에 남겨두고 언제든 부르면 가겠다'라는 딸의 말은 엄마에겐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사실 나에게 이번 베트남행은 유학 겸, 휴식 겸, 이주노동 겸, 사랑하는 사람과의 시작이었지만, 엄마에겐 그저 친구같던 막내딸이 저 한국보다 덜 개발 된 멀리 있는 더운 나라로 시집가는 것 뿐이었다. 스무살 때부터 쬐그만 여자애 혼자 여기저기 빨빨 거리고 돌아다닐 때는 그리 묵묵히 기다려 주시더만, 이번엔 영영 돌아오지 않는 곳으로 정말 가는 것만 같으셨나 보다. 아마도 얼마 전 결혼 한 아들에 이어 딸까지 떠나버린 텅빈 집이 미리 걱정되셨을 게다. 엄마와 아들, 엄마와 딸의 관계는 그 어느 집보다도 각별했으니까.

엄마가 서운함과 서글픔을 토로하다가 문득 꺼내놓은 말씀이 더 잊혀지질 않는다.
"너 11일이 무슨 날인 줄 알기나 하니?"
"음... 나 베트남 가는 날"
".....(찌릿!!)"
"무슨 날인데?"
"엄마 아빠 결혼 기념일 아냐!!!!"
"아..... 그래??!!!"
"하필 왜 출국 날짜를 그 날로 잡은거야!!!"

아빠와의 결혼을 인생 최대의 실수라고 생각하는 우리 엄마에게 4월 11일은 지우고 싶은 날이란다. 오죽하면 제일 싫어하는 숫자가 '4'와 '11'이라고 말하는 엄마에게 나는 '4월 11일'을 더 기억하기 싫은 우울한 날로 만든 불효녀(?)가 된 셈이다. 난 출국 날짜를 별 의미 없이 '문군의 생일 전에', 그리고 '주말 동안 짐 정리를 같이 할 수 있으니 금요일 저녁에 도착하는 것이 낫겠다'  싶어 그 날로 정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고 말았다.

'엄마, 난 엄마 아빠의 결혼 기념일 챙긴 기억이 초등학교 3학년 때 이후로 없어서...ㅠㅠ 엄마 미안!!'





#2.
그 전날 잠을 설친 탓에, 그리고 인천 공항에서 전화 하면서 눈물 콧물을 펑펑 쏟아낸 탓에 너무 피곤해서인지 나는 기내식을 먹자마자 비행기 안에서 깜빡 깜빡 잠이 들었다. 그러나 한국에 휴가차 다녀온, 하노이에 사는 듯한 한국 아기들이 여기 저기서 어찌나 울고 보채는지. 깊이 잠들기는 어려웠다. 그렇게 반 수면 상태로 4시간 반이 지나자, 서서히 어둠이 내린 하노이의 상공이 창밖으로 들어왔다. 어두웠지만 분명 수없이 드나들었던 하노이 공항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나는 하노이를 다시 만난다는 설레임과 반가움 보다는 한국에 대한 미련과 그리움이 더 컸기에, 불과 몇 시간만에 다른 나라로 이동했다는 사실을 미처 실감할 수 없었다.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 건물에 들어섰다. 입국 수속은 내가 처음 베트남에 왔던 2010년에 비해 너무도 많이 친절해지고, 체계화되어 있었다. 자잘한 변화들이 놀랍기도 했고, 어색하기도 했다. 나는 한국에서 한달짜리 여행비자를 미리 받아왔으나, 내 여권에는 이미 여러장의 베트남 비자 스티커가 붙여 있었기에 출입국사무소 직원은 내 여권을 이리저리 넘겼다 또 넘겼다 하면서 새 비자를 찾아냈다.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나는 여권에 도장을 찍는, 절도 있는 '쾅' 소리에 나도 모르게 '깜언(고맙습니다) 아잉' 이라고 베트남어를 내뱉었다. 그리고 여권을 받아 나왔다. '드디어 와버렸구나.' 만감이 교차했다. 결국 다시 나는 베트남에 와 버렸다.





#3.
비교적 남들보다 잦았던 내 비행기 탑승 역사상, 나는 가장 무거운 19키로의 짐을 들고 베트남으로 이주를 왔다. 4년 전 베트남에 처음 파견되었을 때 내 배낭의 무게는 18키로였다. 이번 짐의 삼분의 일은 책이었고, 삼분의 일은 엄마가 고이고이 모셔두었다 넌지시 내 짐 옆에 놔둔 고급 6중 냄비세트였다. 그리고 나머지는 내 여름 옷가지들과 새로산 운동화, 그리고 문군에게 줄 생일 선물인 옷 몇벌과 운동화 정도. 엄밀히 이민이었으나, 이민가방은 없었다. 인천 공항에서 수하물로 붙였던 두개의 라면박스가 나오기를 한시간 넘게 기다리는 동안, 온갖 형형생색의 히말라야 코스프레를 한 한국인 관광객 아저씨, 아줌마들이 내 옆에서 '이 느려터진 시스템이 문제다', '이래서 아직 후진국 이구나' 라는 말을 쉴 새 없이 늘어 놓았다. 십수명의 단체 관광객들이 서로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고, 유쾌하지 않은 말들을 한마디씩 더 보탰다. 다른 것은 못난 것으로 비난하면서 어떻게서든 자신의 우월함을 찾으려는 어른들의 무리에서 나는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이마트 노끈으로 묶어 둔 두개의 박스는 제일 마지막으로 나왔다. 나는 도망치듯 서둘러 자리를 떴다.

카트를 끌고 출국 게이트를 나왔다.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며 앞으로 한발 한발 내딛는데, 저어기 누군가 빼꼼히 고개를 내민다. '이쁘게 입고 나와'라고 한 지나가는 소리에, 이 더위에 어울리지 않을 법한 자켓에, 청남방에, 구두까지 신고 나와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문군이다. 그리웠던 그 큰 얼굴과 뽈록한 배가 참 반갑다. 기대에 못미치는 아주 약간의 습기와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문군이 잡아 둔 택시에 올랐다. 드디어 나는 하노이에 다시 와버렸다.


<우리 집에서 바라본 동네 풍경>

댓글 2개:

  1. 결국?ㅎㅎ 건강하세요!!! 기회되면 저도 다시 하노이 땅을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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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응 그래. 영규야. 언제든 웰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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