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20일 화요일

머물러라, 너는 정말 아름답구나!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나. 무력한 나. 목적을 잃어가고 있는, 아님 어쩌면 목적을 아직 모르고 있는 나. 요 며칠 하노이에 사는 '한국' 사람들에게서 나름의 상처(그들은 상처를 준 지도 모를)를 받고는 혼자 꿍해져서 술한잔 걸치고 들어온 문군에게 주저리 주저리 하소연을 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동네, 어쩌면 하노이, 어쩌면 저모양 저꼴로 돌아가고 있는 한국, 어쩌면 모두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 대해. 문군은 정신이 오락가락 영혼 없는 맞장구를 쳐주다가 잠이 들어 버렸고, 이런 이야기를 지껄이는 스스로를 되돌아보다가 나 역시 잠이 들어 버렸다.

허무함 혹은 무력감이 극에 달한 그 다음 날, 하노이는 무려 최고기온 40도를 육박했다. 하릴없이 오후 내내 집안에서 멍하니 땀만 흘리고 있는데, 느닷없이 누군가와 이야기가 하고 싶어졌다. 나의 베트남 행을 누구보다 지지해주었던 몇몇 사람들에게 메세지를 보냈다. 그리고 '잘 지내고 있냐'는 질문에 나는 '그냥 그래요. 여기는 이렇고, 나는 이래요.'라고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고 말았다. 내가 마주한 고민거리에 대한 또렷한 답을 강구한다기 보다는 그냥 내 상황에 대해 '맞아, 맞아.'하고 맞장구 쳐주는 것이 듣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베트남에 너무도 오고 싶어서, 지금 내가 어떻게 살아가는지는 무관하게 '베트남에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내가 너무 부러운 대상이 되어버린 한 쌤에게 나는 계속 주저리 주저리 떠들었다. 이곳에서 눈에 보이고 들리는 부당한 상황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혹은 하지 않는 나. 그리고 이 잘못 돌아가고 있는 판국에 대해 하노이에서 함께 공감할(아니 함께 욕할?)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것. 아니 실은 하나하나 실망을 안겨주고 있는 이곳의 한국 사람들과 내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 어쩌면 '나는 달라'라는 생각으로 혼자 잘난 척 하고 있지만, 베트남 사람들이 보기엔 나 역시 똑같은 '돈 많은' 한국 아줌마 라는 거. 오랜만에 연락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느닷없이 털어 놨는데, 쌤이 하는 말이 정말 우문현답 이었다.

"조급해 하지 마세요. 당장 뭔가 쇼부 보려고 간 것도 아니고 '관찰자적', '방관자적' 시점이 필요한 시기 잖아요."
"그게 어렵죠. 성질 급한 나로써는. 귀머거리 삼년, 벙어리 삼년 해야하나요... ㅎㅎ"
"ㅋㅋㅋㅋ 사실 간지 진짜 얼마 안되었어요, 쌤."
"아.... 그죠?"

맞다. 맞는 이야기이다. 얼마전에 하노이에서 새롭게 알게 된 한 분이 다시 온지 한달이 조금 넘었다는 내 말에 화들짝 놀라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니 한달만에 집 정리를 다 하고, 학교도 등록해서 다니신다고요?"
"한달이나 되었는데요. 뭘."



'띵' 했다. 나는 한달이 넘도록 뭘 하고 있는가. 학교를 다닌다면서 주 3회만 책상에 앉아 있고, 여기저기 하노이 시내를 돌아다닌다면서 너무 덥다는 핑계로 나서질 못했다. 하루 종일의 일과를 보면 한심하기 그지 없구나. 라고 자책하고 또 자책하기 시작했는데, 알고보니 나 참 편하게 잘 적응하며 열심히 지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텅 비었던 집에 필요한 모든 물건을 다 갖추었고, 이제 이달 말에 엄마가 와서 냉장고를 꽉 채워 주기만을 고대하고 있고, 김치니 반찬이니도 사다가 냉장고에 채워 넣었고, 가끔 밥도 하고 가끔 요리도 했다. 우리집에 몇명을 초대해서 요리랄 것도 없지만, 준비한 음식으로 함께 식사를 하기도 했다. 주 3회 새로 산 중고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가서 오전 내내 베트남어 수업을 듣고, 저녁에는 동네 공원에서 산책 혹은 베트민턴을 쳤다. 매주 월요일 저녁은 풍물 동아리에 가서 장구를 치고, 일주일에 2~3일은 약속을 잡아 밖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다. 그 중 절반 이상은 베트남 친구고, 베트남 친구들과는 베트남어와 한국어를 함께 쓴다. 매주 주말은 문군과 집안 대청소를 했다. 2주에 한번은 한인 도서실에 가서 책 3권을 빌려와 읽는다. 물론 집에 공부하고자 한국에서 가져온 책은 아직 펴지도 않은 채 그대로 있지만, 먼저 읽고 싶은 책이 도서실에서 빌려온 책들이라 아직은 뭐라도 읽자 하면서 위안을 삼고 있다. 몇몇 엔지오나 몇몇 베트남 단체에서 프로젝트를 함께 하자는 제안도 받고 있지만, 최선을 다해 거절하면서 거절하는 나름의 논리를 만들려 하고 있다.

그렇다. 나는 한달 잘 지냈다. 하루하루 알차게 잘 지냈다고는 못하겠지만, 누가 뭐 하라고 쪼는 사람도 없고, 당장 내가 벌지 않으면 굶어 죽는 상황도 아니고, 그간 열심히 일했으니 잠시 좀 쉬라는데 내 이렇게 살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간 문군에게 '몸은 너무 편하나, 마음은 편치 않다' 라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나는 그 답이 내 안에 있는 것을 미쳐 알지 못했다. 하노이에 해가 지기 시작하는 시간이 늦어졌다. 반대로 해가 떠있는 시간은 길어졌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저녁은 짧아졌다. 해가 지는 시간은 참 짧다. 순식간이다. 여유를 갖지 못하면 허둥 지둥 대다가 이 아름다운 하노이 노을을 못보는 수가 있겠다. 여유를 갖아야 한다. 천천히. 차근차근.

5월의 하노이 저녁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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