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다시 그려볼까 하고 있다. 예전에는 드로잉이 일상이었는데, 이제는 일이 아닌 이상 펜을 손에 쥘 일이 없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에서 떨어져 있는 시간을 늘리기 위해서라도 종이와 가까워져야 겠다는 결론이 나왔다. 책을 더 많이 읽고, 종이 위에 드로잉을 시작하겠다.
그냥 집에있는 펜과 종이로도 가능하지만 내가 즐겨 썼던 드로잉 도구들이 있을까 하고 시내에 나간 김에 둘러봤다. 오호라 석고상도 있네? 입시 봤던 옛 기억이 새록새록.. 아그립파 인가? 줄리앙인가?... 이 새로운 석고상은 뭐지????? 가까이 가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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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본 석고상은 온통 호치민 주석상뿐!! |
앗!!! 호치민 주석 상이구나..!!!@$#^$@&
물론 소묘용이라기 보단 각 학교나 공기관의 단상에 모셔 둘 장식용이겠다만, 막상 호주석 석고장이 이렇게 잔뜩 있는 모습을 직접 보니 당황스러웠다.
미대 입시 준비를 할 시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석고 소묘는 줄리앙의 부푼 앞머리, 투사의 섹시한 잔근육, 카라칼라의 찡그린 미간 정도였다. 아니, 다시 말하면 그 부분들을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기 보다 그 부분들에 끌렸다. 그 당시 내가 이성에 끌리는 외적인 부분이 바로 그것들이었달까.. ㅎㅎㅎ
물론 싫어하는 석고상들도 있었다. 비너스의 특징없이 넙대대한 볼따귀, 세네카나 호모의 푹 파인 볼과 주름들, 그리고 아리아스 그 여자의 심하게 꼰 머리 스타일 정도.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나는 여자 석고상들은 유독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다행히 석고상은 남자가 더 많았고, 내가 본 모든 실기시험에선 남자 석고상만 나왔다. 내가 그리기 힘들어하는 석고상들은 나오지 않았다.
갑자기 베트남의 미술대학 입학시험은 어떨까 하는 상상이 들었다. 만약 실기 시험이 있다면, 만약 석고 소묘가 있다면 모든 입시생들이 호주석 석고상을 앞에 놓고 경건하게 그리지 않을까? 실제 저 석고상도 실제의 호주석 모습보다 더 통통하고 건장한 청년처럼 잘(?) 생기게 그려놨는데, 입시에서도 잘생긴 호주석의 모습을 채점관들이 더 좋아하지 않을까? 만약 내 상상처럼 실기 시험이 이루어진다면 한국처럼 어떤 석고상이 나올까 고민하지 않아서 좋을테고, 더 나아가 생각해보니 굳이 우리가 일면 관계없는 서구의 얼굴들을 몇 백번씩이나 그리면서 연습해야 했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베트남에서 국부인 호주석의 석고상을 이렇게 쉽게 볼 수 있듯이, 우리도 이순신 장군이나, 세종대왕이나 유관순 언니 같은 얼굴을 그리라면 어떨까? ㅎㅎㅎ 그래 물론 감안해야 한다. 동양의 얼굴들을 소묘를 그리기엔 서구형 얼굴들보다 밋밋할 거라는 건. ㅎㅎ
호주석 석고상 떼를 보고 놀란 마음을 뒤로 하고, 나는 줄줄줄 그립감 좋은 펜 두자루를 사들고 나왔다. 그림 그려야징. 끄적끄적 다시 시작해야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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